
사색의 계절 가을이 왔다. 전국 방방곡곡 축제도 볼 만하지만 미술 전시회에 가보는 건 어떨까. 세계를 이해하고 풍경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여기에 있다. 바쁜 일상을 벗어나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갤러리를 소개한다.
이세준, 정현두, 류민지 3인전이 11월 14일까지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 있는 에이치플럭스 갤러리(대표 허은미)에서 열린다. 주목 받는 작가 3인의 삼색 예술혼이 깊어가는 가을에 새로운 묘미를 더해줘 미술 애호가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다음은 갤러리 측의 작품 해설이다.

“언제나 우리는 이 세계를 선명하게 바라보며 이해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가 마주하 는 것은 대상 그 자체라기보다 그것과 내가 형성하는 거리 속에서 구성된 하나의 해상도(resolution)에 가깝다. 세계는 모두에게 동일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고 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인식하는지, 즉 관찰자가 대상을 어느 위치에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층위로 분해되거나 새롭게 조직된다. 이때 해상도는 단순히 더 또렷하거나 흐릿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어떤 밀도와 구조로, 그리고 어떤 한계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나는지를 결정하는 지각의 조건이다. 우리의 기준에서 본다면 대상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형태는 해체되어 물질의 덩어리로 흩어지고,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겨날 때 비로소 흩어진 것들은 하나의 풍경으로 조직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거리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각과 신체를 기준으로 한 상대적 조건일 것이다. 이를테면 미시세계의 존재에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감각하는 거리가 아득히 먼 간격으로 경험될 수도 있다. 더구나 현대의 시각 경험은 때때로 우리에게 서로 다른 거리와 시선을 동시에 요구하기도 한다. 그 순간 그렇게 구성된 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로 유지되지 못한 채 분열되고 다시 재구성되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올바른 거리나 그것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단 하나의 해상도를 상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대상과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의 한 상태일 뿐이다.”

“정현두의 회화는 대상의 본질에 대한 감각적 접근에서 출발한다. 그의 화면은 형상을 안정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그것이 무너지는 지점까지 밀어붙인다. 거칠게 축적된 물질은 더 이상 대상을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이미지 이전의 상태, 아직 조직되지 않은 감각의 덩어리로 되돌아간다. 그렇기에 그의 회화는 일견 대상에 대한 과도한 근접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세계는 해상도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도하게 높아진 밀도 속에서 더 이상 하나의 형상으로 읽을 필요가 없는 상태로 전환된다. 가까워짐으로써 더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알고 있던 형상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물질과 감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류민지의 작업은 다른 두 작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계가 하나의 풍경으로 성립하는 일종의 '보편적 거리' 위에 놓여 있다. 여기서 보편적 거리란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이라기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풍경으로 받아들이는 익숙한 감각의 거리에 가깝다. 그의 화면에서 감정과 시선은 일정한 균형을 이루며, 관람자는 그 안에서 익숙한 공간과 정서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풍경 역시 완전히 고정된 것은 아니다. 화면을 구성하는 공기와 빛, 색의 미묘한 흔들림은 지금 눈앞에 놓인 풍경이 하나의 확정된 세계라기보다 특정한 시선과 감각 속에서 잠시 조직된 상태임을 암시한다. 그의 회화는 세계가 하나의 이미지로 읽히는 순간과 그것이 다시 다른 상태로 이행할 가능성 사이의 긴장을 유지한다.”

“이세준의 작업은 하나의 해상도로 세계를 통합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서로 다른 거리와 시선을 하나의 화면 안에서 충돌시키고, 분리된 이미지와 공간을 다시 연결한다. 화면은 분할되고 이어지며 때로는 물리적인 공간으로 확장되고, 관람자의 위치와 이동에 따라 서로 다른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는 세계를 가능한 한 많은 방향에서 바라보고 연결함으로써 하나의 전체에 접근하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전체가 하나의 시점으로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서로 다른 거리에서 발생한 이미지들은 하나로 수렴하지 않은 채 나란히 놓이고, 중첩되며, 충돌한다. 세계는 하나의 완성된 모습으로 제시되기보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복수의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전시는 세 작가의 회화를 통해 세계가 고정된 형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우리 사이의 거리와 시선에 따라 끊임없이 다르게 구성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미지는 때로 밀접한 거리에서 형상을 벗어나 감각과 물질의 덩어리로 나타나고, 때로는 하나의 풍경으로 조직되어 익숙한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또 다른 이미지들은 서로 다른 거리와 시선이 중첩된 채 존재하며, 단일한 인식으로는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구조 자체를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세계를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거리는 세계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조건이며, 그 조건이 달라지는 순간 우리가 세계라고 믿었던 모습 역시 함께 달라진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세계는 과연 세계 그 자체인가, 아니면 나와 세계 사이에서 잠시 맺힌 하나의 형상인 것일까.”
박은석 기자 gikpri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