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공원 산책] 연구원 아파트 "은행알 추첨"

92년 가을 어느날, 음산한 날씨가 창밖으로 보이는 가운데 대덕 연구단지 내한국원자력연구소 강당에서는 긴장된 분위기에서 은행알 추첨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학교 무시험 진학을 위한 학교 배정 추첨이나 복권 당첨을 위한 추첨이 아니고 연구단지내에 건립되고 있는 4천여 가구에 달하는 연구원 아파트의 동, 호수를 추첨하는 자리였다.

첨단 연구 시설 속에서 최신의 정보를 바탕으로 세계에서도 앞서가는 새로 운내용을 연구하는 대덕연구단지 연구원들이 정작 자신들이 입주하게 될 아파트 동, 호수를 결정하는 일에는 첨단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고 원시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은행알로 추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가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일반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계기는60년대 말, 치열했던 중학교 입학시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하여도입된 무시험 추첨 진학이었다.

제도 시행 초기에는 은행알속에 학교 번호를 써넣고 이를 다람쥐 쳇바퀴 같은 통속에서 돌려, 나오는 은행알 속에 적혀있는 학교 번호에 따라 진학할 학교가 결정되는 방식을 사용했다. 세간에서는 이를 뺑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은행알 추첨이란 무작위로 진학할 학교를 정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중하나인데 제도 시행 후기에는 컴퓨터가 추첨을 대신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컴퓨터가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컴퓨터가 추첨을 대신하는 데에는 수학자, 통계학자, 컴퓨터 공학자의 공이크다. 추첨은 본질적으로 무작위성, 비정규성, 고른 분포성 등의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컴퓨터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사용한다. 32비트로 하나의 숫자(정수)를 표현하는 컴퓨터의 경우 0부터 2의32제곱 즉 42억9천4백96만7천2백95까지의 정수를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특정한 수식, a(n+1)-b*a(n)mod (2의 32제곱)를 이용하여 0부터 2의 32제곱까지의 숫자를 순서대로 만들어 낸다. 여기서 a(n), a(n+1)은 각각 순차적으로 생성되는 정수를 의미하고 b는 이 수식에서 생성되는 숫자들이 최대한 무작위성을 갖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는 특정한 숫자이다. 따라서 이 수식의 최종결과는 항상 0에서 2의 32제곱 사이의 숫자가 된다.

마지막으로컴퓨터는 이 수를 2의 32제곱으로 나누어 그 몫을 (항상 0에서 1사이의 수가 됨) 하나의 난수(Random Number)로 정한다. 그런데 컴퓨터가 생성하는 이러한 난수는 완전한 난수가 아니고 반복성이 있는 난수이다. 즉 하나의 난수가 결정되면 약 43억번 뒤에는 또 다시 이 수가난수로 결정되게 된다. 따라서 수학자들은 이를 의사 난수(Pseudo Random Number)로 부른다.

그러면 이러한 방식을 잘 이해하고 있을 연구원들이 정작 자신들의 아파트 추첨에서는 왜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고 은행알 추첨을 택했을까? 한마디로 컴퓨터추첨은 조작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아파트추첨을 위한 컴 퓨터프로그램을 작성하는 프로그래머가 자신이 입주하게 될 아파트의 위치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만들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난수생성방법에 따라아파트추첨 프로그램을 작성한다면 조작의 가능성이거의 희박하겠지만 다른방법을 쓴다면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첨단과학기술을 다루는 대덕연구단지 연구원들이 컴퓨터추첨이 아닌 은행알로동.호수를 추첨했다면 아이로니컬하지 않은가? 몇년 전 필리핀선거에서 컴퓨터로 선거결과를 집계하던 중 자료를 입력하 던사람들이 갑자기 우루루 퇴장하던 장면이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방송된 적이있다.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이 입력한 대로 결과가 집계되지 않고 무조건 마르코스 당시 대통령에게만 유리하게 집계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당시 필리핀 정치상황에서 실제로 조작이 있었던 것 같다.

컴퓨터는 분명히 대단한 문명의 이기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유용성은 결 국이를 사용하는 사람의 도덕성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