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아한글」의 부활을 계기로 취약한 국내 소프트웨어(SW)산업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SW업계에서 새삼 제기되고 있다. 비록 「한글」은 되살아났지만 시장지배력을 가진 SW조차 살아남기에 급급한 SW산업환경은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제2, 제3의 「한글」사태가 잇따라 터질 것이라고 SW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고질병이 된 왜곡된 국내 SW산업구조를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식과 접근방식을 갖고 대안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불법복제
지난 20일 마이크로소프트(MS)의 투자유치를 백지화한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사장은 기자회견장에서 「한글」의 불법복제에 대해 여전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MS의 투자를 유치키로 한 결정은 옳았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지금까지 꾸준히 「한글」 정품을 사용한 사람들만이 나를 비난할 자격이 있으며 이들에게 미안할 뿐이다』고 말했다.
이같은 이찬진 사장의 발언은 지난달 15일 MS와의 투자합의를 발표할 당시 「한글」포기를 불법복제의 탓으로 돌렸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사장의 말대로 불법복제만 아니었다면 글포기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글쎄』다. 불법복제가 「한글」포기의 한 원인이 됐을지는 몰라도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믿을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SW의 평균 불법복제율은 43%다. 이가운데 PC판매상과 학원의 불법복제 SW사용률이 각각 70%, 63%에 달해 불법복제를 주도하고 있으며 일반기업은 35%, 기타는 14%로 나타났다.
불법복제제품을 저작권사별로 보면 미국 볼랜드사 제품의 복제율이 73%로 가장 높았으며 한글과컴퓨터는 50%, 마이크로소프트는 24%로 나타났다.
시중에 깔린 「한글」의 절반이상을 불법복제제품이 차지한 셈인데 한컴의 경영에 타격을 줄만한 비율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같은 수치는 평균 불법복제율을 조금 웃도는 것으로, 한컴이 다른 SW업체에 비해 유독 불법복제에 시달렸으며 이 때문에 「한글」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설득력을 잃는다.
또 SW의 불법복제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컨설팅회사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의 최근 보고서는 SW불법복제율이 일본의 경우 47%, 싱가포르는 59%이며 한국은 70% 수준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불법복제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여전히 높지만 다른 선발 아시아국가들도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불법복제SW로 골치를 앓고 있다.
오히려 새삼 주목해야 할 대목은 국내 SW사용자들의 30%가 정품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불법복제율이 후진국 수준인 90%대에 이르면서 미국의 업무용소프트웨어연맹(BSA)과 같은 기관의 요시찰 국가였다. 비록 더딘 속도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정품 SW를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 SW업체들은 더이상 불법복제의 폐해만 문제삼지 말고 이같은 변화에 눈을 돌려야 한다. 또 지적재산권의 천국이라고 불리우는 미국에서도 불법복제율이 27%에 이른다. 불법복제관행은 사실 완치가 거의 불가능한 병이며, 오히려 제품보급 초기에는 저변확대에 필요할 때도 있다. 바로 SW업체들은 이를 인정하는 선상에서 새로 출발해야 한다.
이와관련 국내 워드프로세서시장에 대한 MS의 최근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MS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워드를 무료 공급하는 등 아예 불법복제의 관행을 양성화하는 방향으로 마케팅전략을 집중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MS의 마케팅전략은 후발주자가 감내해야 할 고육지책이며, 월등한 자금력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바로 불법복제관행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선에서 『PC사용자들은 쓰고 있는 워드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는 워드프로세서의 속성을 간파한 무서운 마케팅기법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비해 한컴을 비롯한 국내 워드프로세서업체는 소비자가 구태여 찜찜한 불법복제를 시도하지 않도록 개발단계에서부터 제품기능과 가격을 차별화하고 정품사용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마케팅기법의 개발과 같은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불법복제는 필요악」. 이번 「한글」사태를 넘긴 국내 SW업계 전반에 던져진 화두다.
<신화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