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무심결에 기술용역이라는 말을 했다. 내가 하는 일은 보안이 되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입밖에 낸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실제 한국인이라는 것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컴퓨터는 현대의 마술사예요.』
여자가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컴퓨터산업을 정보산업이라고 하지요. 금세기는 그 정보산업이 모든 것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것은 서비스산업과 맞물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봅니다.』
『다음 오는 세대는 어떤 것일까요?』
『다음은 아마 문화시대가 아닐까 합니다. 인간 생활이 풍요해지고 정보유통이 활발해지면 인간이 원하는 것은 문화적인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예술품이 실제 진가를 나타내는 시대가 오지요. 결국 문화산업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커피를 마신 후에 우리는 호텔로 올라갔다. 서로 잘 자라고 인사를 하고 헤어져서 각자의 방에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가 커튼을 열고 밖을 보았다. 백야의 여명을 받은 네바강은 아주 조용했다. 강폭은 비교적 좁아서 하천같은 느낌을 주지만 바다를 다니는 큰 배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수심이 깊었다. 기선 한 척이 천천히 지나가면서 항만으로 빠져나갔다. 샤워를 하고 잠을 청했으나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은 무사히 보냈다.
아침에 네바강에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를 들었다. 뒤이어 노크 소리에 잠이 깨어 문을 열어보니 나타샤가 서 있었다.
『굿모닝』하고 그녀가 영어로 인사를 했다. 그녀는 새 옷을 꺼내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 깃에 꽃무늬 주름이 있었고, 가슴이 탁 트여서 목걸이가 더욱 돋보였다. 그녀는 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방에 남겨두고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나왔다.
『오늘 날씨는 비가 올 것만 같죠?』
열린 창문을 통해 구름이 낮게 깔려 있는 흐린 날씨가 보였다.
『조금 전에는 눈이 왔어요. 이곳의 첫 눈인가 봐요.』
우리는 옥상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가 아침식사를 하였다. 아침식사는 토스트와 계란 반숙이 전부였고, 약간의 과일과 우유가 제공되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다시 눈이 내렸다. 눈을 맞으면서 네바강변을 걸었다. 우리는 구 해군성 건물 부근에 있는 데카브리스트 광장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