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취재기간중 방문한 KSP는 가나가와현에서 운영중인 연구개발기업의 집적 거점으로 일본 최초의 도시형 사이언스 파크.
이곳은 신생 벤처기업뿐 아니라 어느 정도 성장한 연구개발형 기업 등이 모여 있는데 성장단계에 따라 체계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신생벤처의 경우 최고 7년간 입주가 가능(국내의 경우 보통 1년, 최고 2년)해 리스크가 큰 하이테크를 목표로 하는 기업에 적합한 환경과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에 입주해 있는 벤처기업의 사장 토시오 오쿠노는 『우리 회사는 창업한 지 6년째로 하이테크 기술개발에 매진해온 결과 창업 당시부터 계속 적자를 내고 있지만 KSP의 장기적인 지원프로그램과 창투사 및 정부의 릴레이식 투자 덕분에 장기간에 걸친 연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그 내용을 국제특허출원중』이라고 말했다.
만약 우리나라의 경우였다면 연구비만 잡아먹는 이런 회사는 길어야 3년을 못버티고 없어졌을 확률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만약 우리처럼 그랬다면 이 회사는 모든 크기의 제품을 자유롭게 검사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TFT LCD 검사장비는 아직도 현실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술개발 투자의 결과를 참고 기다리는 마인드가 형성돼 있다는 점이 장기간의
투자와 시간을 요구하는 벤처산업을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벤처붐과 정보기술(IT)산업의 육성을 놓고 일본열도가 달아오르고 있다. 다른 산업분야에서는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일본이 IT분야에서는 미국은 물론 가까운 한국에도 한참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모리 정부도 마침내 IT산업의 육성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일본 전자업계 관계자들은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업무상 한국을 자주 방문한다는 일본 부품업체의 한 관계자는 『한국은 최근 인터넷 열풍이 정도를 넘어선 것 같다』며 『아무리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IT산업이 발전한다 해도 부품·소재 산업에 대한 관심과 기술개발 노력이 없이는 균형잡인 전자산업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일본이 세계 최고의 전자산업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세트제품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소재 및 부품을 개발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전자부품산업은 질과 양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이는 여러 가지 통계자료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양적인 측면에서 일본의 전자부품 생산액은 미국의 842억5100만달러에 이어 797억1900만달러로 세계 2위에 그쳤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부품 생산이 반도체(인텔의 CPU, 마이크론의 메모리반도체 등) 제품에 집중된 반면 일본은 범용부품을 비롯해 기술집약적 무선통신부품, 장치산업적 2차전지, 반도체, TFT LCD 등 전분야에 걸쳐 있다. 이들 품목의 대부분이 세계 시장에서 1, 2위를 달리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일본은 실질적으로 세계 1위의 전자부품 생산대국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자부품 및 디바이스 중에서 수동·접속부품을 위주로 한 전자부품의 생산량은 지난해 3조6261만엔에 달하고 있다.
성장률면에서 일본 전자부품산업은 지난해 고부가·첨단 디바이스분야에서 반도체 소자가 7.3%, 집적회로가 7.3% 그리고 액정디바이스가 무려 41.8%의 고성장을 이룬 데 힘입어 전체적으로 5.9% 성장률을 기록, 견조한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전자부품산업이 견조한 성장세를 지속하며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초창기부터 독립해 치열한 경쟁환경을 이겨낸 일본 부품업체들의 생존 메커니즘이다.
일본 전자부품업체들은 특정 대기업 위주로 납품하는 수직적 거래관계이거나 대기업 계열로 이루어져 있는 한국과 달리 처음부터 독립기업으로 시작해 세계 시장을 무대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독자생존의 길을 걸어온 것.
『일본 부품업체들은 한마디로 자수성가형 기업으로 살인적인 엔고와 고임금뿐 아니라 국내외 세트업체의 까다로운 부품 신뢰성 테스트 등 수많은 어려움을 스스로 이겨내면서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는 강인한 체질을 갖게 됐다』는 게 일본전자기계공업회(EIAJ) 하라다 홍보실장의 설명이다.
따라서 한두개 대기업의 정책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국내 부품업체들의 체질개선 없이는 국내 부품산업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국내 부품업체와 비교할 때 일본 부품업체들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절대적인 강점은 바로 재료 및 설계, 생산기술의 수직통합 능력이다.
『무라타는 부품의 원천이 되는 재료기술에서부터 설계·생산기술까지 갖고 있어 기술의 수직통합에 의해 세계 최고 수준의 부품개발 및 생산이 가능하다』는 무라타 요코하마사업소 기술개발실 가타야마 실장의 말은 부품의 원재료는 물론 핵심 설계기술까지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국내 부품업계의 현실과는 한차원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부품산업을 취재하던 기자는 예전에 국내 전자업계 관계자로부터 들었던 얘기 가운데 『우리나라 전자산업은 일본에게 가마우지 낚시법에 이용되는 가마우지와 비슷해 부품·소재산업의 발전이 전제되지 않는 한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실제로 돈을 버는 것은 일본이 될 것』이라는 말이 다시 한번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