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부산과 한성을 잇는 남로전선의 가설공사가 시작될 즈음 미륜사의 몸에 병이 났다. 때문에 전신선 가설공사는 중지되고 말았다. 조선정부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가설이 완료되기를 바랐고, 일본도 그 필요성 때문에 미륜사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여 공사를 진행시키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지만, 그만한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미뤄 질 수밖에 없었다.
미륜사. 자신의 고향 덴마크가 아닌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 땅에서 앓아 누운 그에게 조선의 그 연인은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다. 미륜사는 알고있었다. 몸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라는 것을.
남로전선의 가설공사는 미륜사의 병이 어느 정도 좋아진 1886년 10월 1일을 기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날로 미륜사와 조선정부의 기기국(機器局)위원 임길호가 전신선로의 측량을 위해 충주를 향해 출발했다. 그달 15일에 충주를 거쳐 계속 남하, 11월 5일에는 선로측량은 물론 도면작성까지 끝냈다. 당시 예정 선로는 한성·광주(廣州)·충주·연풍(延豊)·문경·대구·밀양을 경유하여 부산에 이르는 총연장 1050리에 소요 전주수가 1만500주였다. 그러나 경상도 등의 공사준비는 상당히 진행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공사준비가 미비하였고 겨울이 닥친 데다가 전선기기(電線器機)와 물료(物料)가 청국에서 도착되지 않아 실제 가설에 착수하지는 못했다.
남로전선의 가설이 다시 중단되자 조선정부에서는 자주적인 전선 가설을 계획하고 1887년 새해에 접어들면서 전선기기와 물료 구입 및 기술자 확보 등을 자체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같은 해 1월 25일부터 당시 인천에 있던 독일상사인 세창양행과 교섭하여 2월 26일에 3만4150원을 기채(起債)하였는데, 이를 현금이 아닌 각종 전선 및 기자재를 현물로 받아들여 공사에 필요한 기자재를 확보토록 했다. 이 때 조선정부는 남로전선의 계획을 변경, 전주를 통해 대구를 잇는 선로로 바꾸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정부에서는 조선전보총국(朝鮮電報總局)을 설치했다. 1887년 3월 1일 전선을 가설함에 따라 이를 전담할 관서(官署)의 창설에 관한 국왕의 윤허를 얻어 3월 13일에 조선전보총국을 창설하고 동일자로 초대 총판에 홍철주(洪澈周)가 임명되었다.
홍철주 총판은 업무 개시에 앞서 스스로 전보국(電報局) 전무국기(電務局記)를 찬술(撰述)하여 전신의 중요성과 전신 개설의 의의를 밝힘과 아울러 직원들의 중책을 역설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당부하였다.
이는 전무국의 공청(公廳)이다. 불초한 내가 총판의 직임을 맡아 정해(丁亥)년(고종 24년) 봄부터 사무를 집행했으니 주야로 전전긍긍하여 오직 본 직무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다행히 여러 낭료(郎僚)와 공장(工匠) 및 원역(員役)들의 부지런한 동독(董督)에 힘입어 큰 공역(功役)이 준공되었다. 이에 장정(章程)을 세우고 규칙을 정하여 봉록(俸祿)을 제정하고 순찰을 엄중히 하였다. 이제 온 천하가 공리(公利)를 숭상하고 기교가 상등(相等)했으니 천지의 비밀이 누설되고 조화의 권능을 운행하여 그 극치를 달하였다. 둥근 시계를 만들어 시각을 정하였고 지구를 날며 공기를 분석했도다. 기차를 운행하여 원정(遠程)을 단축시켰고 기선을 달려 바람도 능가하였다.
심지어는 전신(電信)으로 필묵(筆墨)을 대신하였고 전광(電光)을 인도하여 우통(郵筒)을 체대(替代)했으니 일순간에 천리를 통신하였고 십점(十點)으로 만언(萬言)을 표현하였다. 그 신기한 용법과 행함은 또한 영이(靈異)하고 광박(廣博)함이 아니겠는가! 이제 혹자는 ‘옛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기이한 술법으로서 승리를 구하지 않으며 먼데에 힘쓰고 가까운 데에 소홀하지 아니하여 덕의(德義)를 닦고 세업(世業)을 지켜 호정외(戶庭外)에 나가지 않더라도 천하사(天下事)를 아는 것이니, 어찌 이런 술법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고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순(舜)임금은 대성인이나 남의 장점(長點)을 취(取)하여 선을 이룩했으니 지금 세상에 살면서 현대보다 나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본국(本局)이 설치된 원인일 것이다.
우리 성상(聖上)께서 밝은 시운을 열었고 정사(政事)를 넓혔으며 서무를 개혁하여 모두 일신하게 하였다. 한성으로부터 두 가닥으로 나누어 남으로는 부산에 이르러 구라파에 달하였고, 북으로는 평양을 넘어 의주를 거쳐 봉황성(鳳凰城) 남방으로 뻗친 선을 전관(專管)했으니 요충에 배치되어 관계(關係)가 더욱 소중하였다.
이 당에 오르는 자는 어찌 명분을 돌아보고 직책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시초(始初)를 염려하고 끝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공청은 옛날 사역원(司譯院)이었는데 이를 수즙(修葺)하고 약간의 방사(房舍)와 낭청(郎廳) 등을 분치(分置), 체번(替番)하여 장부에 기재하며 빈객(賓客)을 영접하고 체신의 사무를 집행하는 장소로 삼는다.
‘이 당에 오르는 자는 어찌 명분을 돌아보고 직책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처음을 염려하고 끝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륜사는 홍철주의 패기에 찬 글을 전해듣고 정보통신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각오와 책임을 잘 나타낸 글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미륜사는 조선의 전기통신사업에 있어서 실로 획기적이며 의미 깊은 일인 조선전보총국의 창설을 환영했다. 이제 조선의 자주적인 정보통신사업 추진의 바탕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륜사는 한동안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이 그곳에서 근무하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조선전보총국의 각 분국 신설과 직원들의 임명이 끝나고, 운영에 대한 규칙의 제정을 서두르는 가운데 미륜사는 조속한 개통을 위해 한성과 부산에서 전선가설 공사를 동시에 착공함으로써 준공을 앞당기자는 제안을 했다. 공사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16일 독일 공사관은 세창양행의 전선 및 기자재 운반선이 항해 도중 홍해에서 침몰하였다는 사실을 통고해 왔다. 이로 인해 남로전선의 가설은 다음해 4월까지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겨울 세창양행의 기자재가 도착하였으나 침몰선에서 인양한 것일 뿐, 새로 주문한 기자재는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888년 봄. 남로전선의 가설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앞서 미륜사가 제안한 바에 따라 한성과 부산 양쪽에서 동시에 착공되었다. 세창양행에 주문한 전선과 기자재도 본격적으로 도착하기 시작하여 공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성에서는 3월 6일부터, 부산에서는 3월 18일부터 각각 착공하여 예정한 4월 말 준공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시켰다. 그리하여 북에서는 4월 5일에 전주까지의 480리 공정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전주·대구의 420리 구간은 무계강(茂溪江)·육십령(六十嶺) 등의 험산심곡에 가로막혀 전혀 공사가 진척되지 못하였다. 암석을 뚫어 전주 하나를 세우는데 반나절 이상이 소요되는 등, 하루 동안의 가설구간이 19∼20리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공사기간은 다시 1개월 연장되고 말았다.
전주에서 진안·장수·안의·거창·합천·고령·성주를 거쳐 대구에 이르는 구간의 험로를 돌파하기 위해 큰 고난을 겪었으나 마침내 1888년 5월 27일, 조선정부의 자체적인 힘으로 남로전선이 준공되고 6월 1일(양력 7월 9일)에는 한성·부산간 전신업무가 개시되었다.
미륜사는 조선의 자주적인 전기통신사업의 시작을 알리는 첫 신호를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