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보보호진흥원(KISA)은 정보보호 관련 기술개발 외에도 사이버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부작용을 사전 또는 사후에 포착해 예방 또는 대응하는 것이 그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말하는 부작용 가운데는 해킹과 바이러스에 의한 폐해가 가장 대표적이고, 이밖에도 사이버상에 등록된 개인정보의 오남용으로 인해 초래되는 사생활 침해 또한 심각한 부작용으로 꼽힌다.
이처럼 업무의 속성상 사이버세계의 어두운 측면도 많이 들여다 봐야 하는 만큼 필자의 사이버생활은 화창한 봄날만큼이나 칙칙한 겨울날도 많다고 말할 수 있겠다. 범죄자를 쫓는 수사관이 말쑥한 신사복 차림에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듯이, 사이버세계의 수많은 문제를 찾아내어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 KISA 연구원들도 가뿐한 마음보다는 긴장속에서 컴퓨터 모니터와 씨름하고 있다. 새로운 해킹기법과 바이러스를 24시간 찾아내 피해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되면 새벽 한 두시에도 예보·경보 발령을 내야 하고, 전자서명을 24시간 안전하게 운영해야 한다. 이 많은 연구원들을 지휘하는 필자 역시 사이버세계의 온갖 유익한 콘텐츠를 활용하기보다는 사이버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갑지 않은 ‘사고’ 가능성에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KISA를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든 즉각 눈치챌 수 있는 것이지만, KISA에는 종이에 적힌 게시물이 없으며, 따라서 게시판도 없다. 직원 사이의 모든 공식적인 의사소통은 100% 컴퓨터를 통해 이뤄진다. 물론 결재 역시 전부 전자적으로 이뤄진다. KISA에서 자체 개발한 전자결재 및 통합정보 시스템에 의해 휴가신청에서부터 주요 문서의 최종 결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서행위가 사이버상에서 진행된다.
컴퓨터업무 가운데서도 가장 첨단에 속하는 정보보호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KISA인지라 이처럼 웬만한 일은 죄다 모니터상에서 처리하게끔 돼 있다. 그러니 이곳의 책임자인 필자는 아예 출근하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모니터를 끼고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숨가쁘게 들이닥치는 전자결재건을 처리한 뒤 잠시 한숨 돌릴라치면 컴퓨터에서 ‘땡’하는 소리와 함께 ‘결재문서가 도착하였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불쑥 화면에 튀어나온다. 그러면 다시 모니터 쪽으로 돌아앉아 문서를 처리한다. 퇴근시간이 임박해 ‘이만하면 오늘 결재는 끝이겠구먼’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슬슬 컴퓨터 전원을 끌 준비를 하면, 이번에는 다시 ‘땡’하면서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라는 메시지가 필자의 소매를 끌어당긴다.
학설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20세기 후반 이래 인류의 지식은 5∼10년만에 배증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속도로 지식이 급팽창해 나가면 앞으로 50년, 100년 후에는 인류가 지식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모르겠다.
21세기에 가장 각광받는 분야가 되리라고 기대를 모으고 있는 생명공학은 그 복잡다단한 연구과정을 거의 전적으로 컴퓨터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게놈의 규명 역시 복잡하기 그지없는 수식을 컴퓨터의 힘을 빌려 계산해낼 수 있었기에 근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진 것이다.
공기나 전기가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컴퓨터가 없는 세상 또한 이제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컴퓨터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 주는 가상현실은 현실과 단단히 밀착해 이제는 아예 우리생활의 일부가 됐다.
숙명처럼 우리곁에 펼쳐진 사이버공간을 안전하고 쾌적한 곳으로 유지·유도해야 할 책무를 지닌 KISA의 책임자로서 필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쉴새없이 팽창중인 사이버세상을 우리 직원들과 함께 ‘진단’하고 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아쉽게도 나의 사이버 25시에 ‘낭만’이 깃들 여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