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IT산업에 물려준 `위대한 유산`

단어 하나에 한달수익 6000만원

 한글창제 반포 3년전인 1443년 어느 날. 집현전 학자들이 대거 모여든 가운데 세종대왕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오늘 드디어 훈민정음 28자를 완성했도다. 이 글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가 될 것이며 이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선사람이면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쉬운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감회어린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먼 후대에 이르러 이 바른소리로 부를 누리는 백성들도 생겨날 것이다.” 그로부터 560년이 지난 2003년. 한글 창제를 주도한 세종대왕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1만원짜리 지폐의 모델로 등장했고, 한글은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에게 막대한 돈을 벌어다주는 키워드로 탈바꿈했다.

 

 한글이 인터넷 서비스와 만나면서 돈이 되는 시대가 됐다. 한글은 최근 검색과 도메인 시장에서 단어 하나가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위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 한글의 비즈니스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상의 시나리오지만 훈민정음 반포 557돌을 맞은 올해 돌아보는 한글은 이제 엄연한 상품코드로 기능하고 있다.

 

 ◇ 한글, IT와 만나 변신하다=사실 초기 IT시장에서만 해도 한글은 다루기 힘든 아웃사이더였다. 미국에서 시작된 IT산업의 구조상 모든 프로그램이나 명령어는 영문이었고 80년대 중반 까지만해도 소수 전문가 집단이 누리는 컴퓨팅과 통신에서 한글의 존재는 잊혀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8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와 IT가 대중화되면서 한글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개인용 프로그램들에 한글화 작업이 요구됐고 한글화가 안된 SW는 현지화가 덜 된 제품이라며 비난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한글은 2바이트 코드의 조합형 문자라는 특수성 때문에 IT에서는 구현하기 힘든, 특히 국내에 IT제품을 판매하는 외국계 기업에게는 가장 골치아픈 진입장벽으로 주류에서는 거리가 멀었다. 89년 아래아한글 워드프로세서의 탄생은 한글이 IT에서 돈이 되는 첫번째 신호탄이었다. 89년 4월 모습을 드러낸 아래아한글은 확장자 .hwp를 워드프로세서의 고유 아이콘으로 만들 정도로 개인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급속히 파고들어갔다. 89년부터 올 9월말까지 15년 동안 한글과컴퓨터가 국내에 판매한 아래아한글 정품SW 판매개수는 총 850만카피. 금액으로 산정하면 무려 1800억원에 이른다. 불법복제 수치와 아래아한글 이후 출현한 훈민정음, 보석글 등의 다른 한글 워드프로세서 상품까지 감안하면 한글과 IT가 만나 수천억원대의 시장을 창출한 셈이다.

 ◇한글 단어 하나가 수백만원=인터넷 서비스와 만나면서 한글은 아예 가공하지 않은 그 자체로 고부가가치 상품이 되어 버렸다. 한글 키워드 검색과 한글 도메인 등을 통해 창출되는 시장은 올해만도 1500억∼16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가운데 포털의 검색광고에서 한글은 그야말로 봉이 김선달의 대동강물 팔아먹기나 마찬가지이다. 네이버에서 ‘꽃배달’이나 ‘대출’이라는 한글 단어 하나는 한달 기준으로 300만∼600만원 사이에 팔린다. 한 곳에만 파는 것이 아니라 10∼25개의 광고주들에게 상품별·위치별로 동일한 키워드를 판매하니 ‘꽃배달’ 하나만으로 올리는 수익은 한달에 6000여만원, 연간 7억원 가까이에 이른다. 그것도 모자라 이와 유사한 ‘꽃배달 서비스’나 ‘학자금대출’ ‘연체대납’ 등의 한글 단어도 50만원에서 100만원 사이에 판매되고 있다. NHN의 경우는 올해 매출목표 1700억원 가운데 400억원 가량이 한글 키워드를 통한 판매일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키워드 검색을 통해 한글이 만들어내는 시장이 올해 1000억∼12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뿐만아니다. 최근 한글.com, 한글.kr 도메인과 넷피아의 한글인터넷주소 등을 통해 한글은 무엇보다 강력한 기업 브랜딩 도구로 등장하고 있다. 영문 도메인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한글 키워드 마케팅이 가능해지면서 도메인 하나당 평균 2만원에서 6만원까지 판매되고 있다. 99년부터 한글인터넷주소 사업을 진행해온 넷피아의 경우 시행 4년만에 유료 등록건수 19만건을 확보했다. 이달 7일부터 시작된 2단계 한글.kr 도메인 등록에서는 8일 오전까지 총 6800여건이 접수돼 하루사이에 1억4000여만원의 수익을 거둬들인 셈이다. 시간당으로 따져도 500만∼600만원의 고수익인 것이다. ◇한글사랑·문화정책에는 무관심=그러나 이렇게 한글을 통해 돈을 벌고 있는 인터넷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한글정보화 연구나 올바른 인터넷 한글문화 정착에는 무관심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넷피아가 한글인터넷주소를 통해 사이버 분단을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매출의 5%를 통일기금으로 조성하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 관련단체과 연계해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으나 대부분의 인터넷 기업들은 한글날에만 일부 이벤트성으로 한글을 강조할 뿐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형 포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하루에도 수억명의 방문자가 찾아오는, 사용자 접점이 가장 넓은 곳인만큼 비속어, 저속어에 대한 지속적인 캠페인을 벌여야하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릴 수 있는 한글을 많이 찾아내고 이를 보급하는데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인혜기자 ihch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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