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수히 많으며 하나의 일만 하는 것은 곤충과 다를 바 없다.”
작년 대덕연구개발특구 비전선포식에서 카이스트 러플린 총장이 우리나라 과학계의 현실을 빗대어 한 말이다. 이 비유는 공상과학소설 작가인 로버트 하인라인의 작품에서 따온 것으로 러플린 총장이 자신의 저서 ‘또다른 우주(A Different Universe)’에 인용, 화제가 되기도 했다.
러플린 총장의 곤충론에 과기계 인사들은 ”학생이나 과학자들이 폭넓은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좀더 큰 틀에서 과학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해야 한다는 해석도 했다.
러플린 총장은 이 같은 맥락에서 학생들이 이공계뿐만 아니라 의학·법학·경영 등 다른 학문과 직업에도 관심을 갖도록 예술·문화·경영경제·의학·법학 분야의 커리큘럼을 확대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얼마 전에는 금융전문대학원도 문을 열었다.
러플린이 여러 차례 공식석상에서 과학기술자의 비즈니스 마인드를 언급한 것도 결국은 곤충론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과학기술도 자유시장 경제원칙에 따라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존재’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카이스트를 관통하는 철학이 지나치게 사회주의적이란 의미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황우석 교수 논문 조작 사건 당시에는 국내 과학계가 지나치게 ‘사이언스’니 ‘네이처’니 하는 외국 전문지를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굳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라는 무게감이 아니더라도 외국인 총장을 영입한 우리 과학계는 그의 말을 통해 자성의 기회를 갖게 됐으리라 믿는다.
이런 러플린 총장이 최근 궁지에 몰렸다. 교수협의회가 중심이 된 연임을 봉쇄하려는 움직임이 노골적이며 러플린의 지난 2년 간의 업적을 평가하는 위원회도 구성된다고 한다. 이사회나 업적평가위원회의 견해에 따라 러플린 총장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과학계의 히딩크를 꿈꾸며 외국인 총장을 영입했던 우리 과학계가 또 다른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은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스럽다.
장길수부장@전자신문, ksj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