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월드인사이드-실리콘밸리의 `창조적 파괴`

 실리콘밸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도로에 즐비한 첨단 기업의 간판 때문에 실리콘밸리에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HP·애플·구글·인텔부터 한국의 삼성·LG·SK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이끄는 첨단 기업 중 실리콘밸리에 본사 혹은 연구소, 개발지사를 두지 않는 회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다 보니 기술 회사를 둘러보는 관광 상품까지 등장했다.

요즘 단연 인기 있는 곳은 마운틴뷰의 구글 본사다. 마치 대학 캠퍼스 같은 자유스러운 분위기, 공짜 점심으로 더욱 유명해진 세계 최강의 검색기업이다.

 그런데 시계추를 10년 돌려보면 이곳의 주인은 구글이 아니었다. 구글이라는 회사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90년대 중반, 이곳은 실리콘그래픽스의 본사였다. 당시 실리콘그래픽스는 세계 최고의 워크스테이션을 만드는 회사로 전자공학도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하는 그야말로 ‘쿨한’ 회사였다. 지금 실리콘그래픽스는 어떤가. 물론 여전히 최고 성능의 제품들을 만들지만 상장 폐지와 파산까지 경험한 회사가 돼버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지역 사람들은 실리콘그래픽스처럼 어려워지는 회사를 봐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제나 새로운 회사들이 그 자리를 메워왔기 때문이다.

당장 실리콘그래픽스 창업자인 짐 클라크는 그 유명한 넷스케이프를 창업해 1년 만에 나스닥에 상장시키고 전 세계 인터넷 혁명의 시작을 알리지 않았던가.

 또 그의 사위인 채드 헐리는 유튜브를 창업하고 역시 1년 만에 16억달러라는 엄청난 가격으로 구글에 파는 데 성공했다. 실리콘그래픽스가 예전보다 많이 빛을 잃었지만 그곳에서 일했던 많은 엔지니어들은 엔비디아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래픽 기술 분야에서 또다시 큰 성공을 이뤄냈다.

한때 최고의 제품과 최고의 직원 그리고 엄청난 자금력으로 모두를 부럽게 만들었던 회사들이 기울고 ‘파괴’된다. 그 대신 최고의 두뇌와 자금은 다른 회사를 세우고 그곳에서 예전보다 더 크고 중요한 ‘창조’의 선순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다.

창조적 파괴라는 말은 원래 경제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지만 실리콘밸리만큼 이를 실감나게 하는 곳은 없다. 전체 산업 측면에서 봐도 그렇다. 실리콘밸리라는 말은 인텔·AMD 등의 반도체 회사가 크게 성장한 70년대에 나온 말인데 요즈음의 실리콘밸리 벤처 자금 투자 현황을 보면 실리콘밸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실리콘밸리의 성장 원동력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나스닥에 상장한 80년대에는 컴퓨터 관련 업종이었지만, 90년대에는 소프트웨어와 인터넷으로 넘어갔고 이제는 모바일, 바이오 기술과 청정 에너지 기업들이다. 이제는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차라리 모바일밸리나, 바이오밸리, 클린에너지밸리로 불려야 더 적당할 것 같다.

무엇이 실리콘밸리의 창조적 파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그 비밀은 혁신이다. 실리콘밸리의 어느 차고 한곳에서 아니면 학교 실험실에서 조용히 일어난 혁신이 불씨가 되어 불과 얼마 만에 수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회사가 된다. 물론 망하는 회사도 많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실보다 득이 훨씬 더 크다. 컴퓨터 동호회 모임을 위해 만들어진 스티브 워즈니악의 컴퓨터는 애플이라는 실리콘밸리의 대표 아이콘으로 성장했고, 스탠퍼드대 학교 프로젝트로 기숙사 방에서 쓰인 래리 페이지의 컴퓨터 프로그램은 구글이 됐다.

새로운 문제에 부닥쳤을 때 삼류 엔지니어들은 다른 회사 제품을 먼저 찾아 보지만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은 문제의 근본 핵심을 파악하려 하고 활발한 토론을 시작한다.

 작은 차이일 수 있지만 이 작은 차이로 인해 혁신적인 기술이 시작된다. 실리콘밸리의 혁신들이 계속되는 한 창조적 파괴는 그치지 않고 창조적 파괴가 계속되는 한 실리콘 밸리는 항상 세상을 이끄는 곳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새너제이(미국) = 오관석

자일링스 엔지니어 실리콘밸리 K그룹 kwan.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