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정의 어울통신]각인효과와 그루의 역설](https://img.etnews.com/photonews/1210/347811_20121029165841_892_0001.jpg)
갓 부화한 오리는 태어난 순간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인지한다. 대상이 사람이든 거위든 청소로봇이든 상관없이 어미 오리로 알고 따라다니고 사랑하기까지 한다. 비교행동학 창시자이자 동물학자인 콘라트 로렌츠의 `각인효과(imprinting effect)`다.
각인효과는 새에게 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포유류와 어류·곤충류에서도 관찰된다. 그만큼 초기의 인지 효과는 대단하다.
재미있는 것은 심리학자 로렌 슬레이터의 후속 연구다. 너구리를 대상으로 실험하던 중 너구리가 인간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은 예견됐지만 연구자 역시 은연중 너구리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상호 각인효과(mutual imprinting effect)`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접한 인식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은연중 상호 행동을 모방하게 되고 비슷한 류의 생각을 하게 된다. `미워하면서도 닮아간다`는 말처럼 모든 인간관계는 상호적이다.
`그루의 역설(grue paradox)`도 흥미롭다. 철학자 닐슨 굿맨은 에메랄드 색깔이 현재 `그린(green)`이지만 미래에도 그린일 것으로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던졌다. 어느 시점 이전에는 그린이었지만 어느 시점 이후에는 `블루(blue)`가 된다는 사실을 표현한 `그루(grue)`라는 단어를 써서 그루의 역설을 논했다.
하나의 일반화가 그것의 사례에 지지를 받는지는 일반화에서 발생하는 속성 개념의 본성에 의존하지만 우연적 인지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회적 기대의 관성과 인지적 습관이 상호작용한다는 얘기다. 과학사회학자인 해리 콜린스는 이를 사회적인 기대의 관성과 우리가 사용해온 관습적 행위로 설명했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과학적 사실이나 근거 없이 정권 획득을 위한 전방위 흠집 내기나 치적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상당 부분 각인효과에 기대고 있다. 나아가 그루의 역설처럼 우연적 인지에 의한 사실의 일반화를 시도하고 있다.
북방한계선(NLL) 논쟁은 사실 여부를 떠나 야당을 안보를 맡길 수 없는 종북세력으로 낙인찍는 각인효과를 발휘했다. 대통령 기록물을 열람해야 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형성될 정도로 각인효과의 위력은 대단하다. 외교적 득실은 안중에도 없지만.
천안함 논쟁도 그렇다. 과학적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아도 정권이 계속되는 한 사건의 결론은 현재의 기조가 맞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어떨지 궁금하다. 그루의 역설이 떠오르는 이유다.
야당 또한 마찬가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대표적이다. 집권 때는 경제영토 확장 개념으로 얘기했다가 실권하자 경제적 식민지 운운으로 바뀌었다.
여야 모두 각인효과에 주력하는 형국이다. 과학기술·정보기술(IT) 분야는 어떨까. 여당의 한 인사는 갑자기 이달 중순 MB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이 압도적으로 잘됐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033명의 교수·연구자 가운데 무려 87.7%가 현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사가 이달 초 142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는 85%가량이 MB정부의 역점 정책인 출연연 구조개편안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열흘 만에 각인효과를 의식한 자화자찬의 결과로 바뀐 것이다.
이공계가 MB정부의 과학기술·IT 정책을 지지한다는 각인효과는 얼마나 될까. 현재로선 부처 개편 논의는 긍정적 기류가 우세하다. 어느 세력, 어느 부처에 유리하든 불리하든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다. 여야 대선 후보들도 이미 공약화했다. 이른바 상호 각인효과다. 그렇다면 그루의 역설도 가능할까.
박승정 정보사회총괄 부국장 sj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