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화상투약기' 10년 투쟁기

박인술 3R코리아 대표를 처음 만난 건 8년 전 여름이었다. '원격화상투약기'라는 기기를 개발했다는 이야기에 취재를 위해 약속 잡은 장소는 자신의 약국이었다. 박 대표는 약사였다. 그는 심야 시간이나 공휴일에는 약국을 찾기 어려운 데 이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IT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약국이 문을 닫아도 약사가 복용을 지도할 수 있고, 소비자에게 적합한 의약품을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면 취약 시간대의 공백을 충분히 메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3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2012년 원격화상투약기를 개발했다. 투약기는 일종의 '원격 약국'이었다. 소비자가 찾아오면 약사와 원격으로 영상 상담이 이뤄진다. 약사는 이후 기기를 제어해 투약기 내 비치된 약을 전달한다. 약국이 문을 닫아도 약사와 상담할 수 있고, 소비자는 필요한 약품을 구입할 수 있어 기존 약국이 안고 있던 시간과 공간 제약을 보완할 수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긴 고통이 시작됐다. 제품을 개발한 이듬해 인천의 한 약국에서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의약품 대면 판매를 규정한 약사법에 위배된다는 유권해석과 약사 단체의 반대에 부닥쳐 2개월 만에 철거했다. 2016년에는 화상투약기를 합법화하는 약사법 개정안이 제출됐지만 20대 국회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됐다. 2019년 규제샌드박스 사업에 선정돼 이번엔 기회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안건 상정이 번번이 무산되며 심의 자체를 받지 못했다. 박 대표는 다시 용인에 있는 한 약국을 통해 상용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약사회가 극렬 반대하면서 설치 나흘 만에 중단됐다.

화상투약기 시연 모습(전자신문DB)
화상투약기 시연 모습(전자신문DB)

이달 20일 마침내 한 줄기 빛이 생겼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규제 특례 대상으로 화상투약기 시범 사업을 승인한 것이다. 정식 판매나 서비스도 아니고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써도 괜찮은지 아닌지 테스트하는 데만 꼬박 10년이 걸렸다.

발표를 접한 순간 놀랍고 허탈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그 긴 시간을 온갖 공격에도 포기하지 않은 게 오히려 신기했다. 동시에 10년간 기회조차 받지 못한 상황에 화가 났다. 평가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회에서 누가 신기술 개발에 뛰어들고, 도전에 나설 것인가.

발목 잡은 약사 단체들은 의약품 오남용과 안정성을 반대 근거로 든다. 약국이나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을 화상투약기로 구매하면 오남용이 되고, 안전성이 떨어질까. 소비자가 자판기처럼 약을 구매하는 것도 아니다. 환자와의 상담 후 약사가 약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또 화상투약기는 냉장보관 시스템도 갖추고,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가 약을 다룬다. 오염 가능성이 더 적을 수 있다는 얘기다.

기술은 발전 속도가 빨라 기존 제도나 관습,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합리적 해결 방법과 발전적 방향은 무엇인지 사회적 논의는 필수다. 그런데 논의 자체를 막고, 평가도 받기 전에 사장되려 한 사례가 바로 화상투약기였다.

박 대표를 처음 만났을 때 취재수첩을 다시 꺼내 봤다. 거기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의약분업으로 약사들 위상이 위축되고, 편의점으로 의약품들이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원격화상투약기로 소비자를 유도해야 약국과 약사가 살아날 것으로 봤습니다. 어차피 오는 변화라면 맞서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화상투약기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약사의 권한 축소나 약국 폐업 등 이권 변화가 아니다. 누가 더 국민 편의를 위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느냐를 따지면 된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떼법일 뿐이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