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K기술 글로벌화를 꿈꾸며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 가족이 시골에서 농장을 일궈 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상영 시간의 절반 이상이 한국어로 채워지고 한국계 감독과 배우가 대거 참여했지만 미국 회사가 제작·투자·배급한 미국 영화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브로커'는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했지만 한국 배우 송강호·강동원 등이 출연한 한국 영화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이 제작했지만 미국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 1억 가구가 넘게 시청한 글로벌 드라마다. 이처럼 영화, 드라마, 대중음악 등 분야에서 글로벌화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한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K팝을 필두로 온라인 플랫폼과 서비스가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K콘텐츠가 우리나라의 국제 위상 변화에 일조하고 있다. 산업기술 분야에서도 K기술의 글로벌화를 위해 많은 기업이 제휴, 합작, 위탁 생산 등 다양한 형태로 국경을 뛰어넘어 기술개발(R&D) 글로벌화를 추진하고 있다.

[ET시론] K기술 글로벌화를 꿈꾸며

국내 기업은 K기술 글로벌화 확대를 지속 추진하고 있지만 기술 선진국의 경쟁사에 비해 속도가 처지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 국내 기업의 글로벌화는 비용 절감이나 시장 개척 등 일차적인 요인에 한정돼 있어 다양한 관점에서 전개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의 글로벌화는 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제조업 중심으로 지나친 편중 현상을 보인다. 글로벌화가 진행됨에도 경영 실적은 기대한 만큼 향상되지 못하고 부진한 실정이다. 국내 기업의 글로벌화가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이를 통해 기업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글로벌화 지역 확대와 업종 다각화, 양에서 질로의 전환 등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코로나19 대유행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적으로 자국 우선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혁신 가속화와 글로벌 가치사슬(GVC) 재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K기술 글로벌화가 절실하다.

세계라는 단일 시장이 무너지고 있지만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경제 블록 내 상호 의존성은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K기술의 글로벌화 추진에 성공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첫 번째 원칙은 독자생존(獨者生存), 즉 후발 주자들이 따라오기 어려운 초격차를 유지하고 독보적 가치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지난해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아시아 순방임에도 그동안의 관행을 깨고 첫 순방지로 일본이 아닌 한국을 택했다. 그 가운데 첫 일정으로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이 위치한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찾으면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것은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고, 세계 반도체 시장의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본격화에 대응, 초격차 기술력 확보를 위한 국가 R&D 체계 설계에 집중하고 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차세대전지 등 우리나라 3대 주력 기술 분야에서 초격차를 확보하기 위해 미래 핵심기술 100개를 선정하고 중점 확보에 나서고 있다. 민간 투자를 지원하고 국제협력, 인력 양성 등에 힘쓰고 있다. 2027년까지 5년 동안 민간에서 156조원, 정부가 4조5000억원 규모의 R&D 자금을 투입하는 한편 민·관 연구 협의체를 출범시켜서 기술 확보를 지원할 계획이다. 경제 안보를 좌우할 핵심 제조업 분야에서 기술 우위, 초격차 기술력 확보는 세계 시장에서 글로벌화를 추진할 때 우위에 설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강조하고 싶은 원칙은 확자생존(擴者生存), 즉 기술협력 확대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다수의 원천 기술을 보유한 국가와는 기술협력 범위 및 형태를 확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정부는 해외 관계 기관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서 우리 기업의 세계 시장 진출을 돕고, 국제 기술협력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미국 상무부 산하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와 협력 의향서를 교환했다. 올해도 기술협력 수요 발굴, 연구자 매칭, 포럼 개최 등으로 긴밀한 교류를 이어 나갈 예정이다.

글로벌화를 위한 협력 대상은 기술 선진국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도 포함된다. 많은 개도국은 단기간에 기술 강국 반열에 오른 우리나라의 제조업 발전 노하우를 습득하고 싶어 한다. 나아가 자국 내 기술 인재 양성과 산업 발전을 위한 인프라 유치에 도움을 받고 싶어 한다. KIAT는 이에 부응해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 30여 개도국에 국제개발협력(ODA) 사업을 진행해 왔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협자생존(協者生存)이다. 국가와 지역을 초월해 다양한 기술협력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 대전환과 공급망 재편 속에 슬기롭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 나라의 독자적인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과의 견고한 기술협력 네트워크 구축이 중요하다.

KIAT는 지난달 미국과 반도체, 이차전지, 미래차 등 전략 산업 분야에서 양국의 산업기술 협력을 강화하는 여러 건의 양해각서(MOU)를 교환했다. 이에 따라 국내 중소·중견기업이 미국 공급망 진출이나 현지 실증에 실질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앞으로도 KIAT는 해외에 있는 산업 단체나 대학의 산·학 협력 지원 조직과 전략적 글로벌 기술협력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구축할 예정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 경제는 구조적 전환을 맞았다. 세계화로부터 방향을 선회해 파편화가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화와 파편화라는 상반되는 가치와 환경 속에서 이를 적절하게 조율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긴밀한 민·관 협력이 필요하다. 국가 간 이해관계에 따라 민간 기업 활동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K기술 글로벌화를 통해 기술 개발 속도와 능력을 높이고, 그 결과 국가 혁신성장을 선도하도록 KIAT는 최선 지원과 노력을 다하려 한다.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bjmin@kiat.or.kr

〈필자〉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은 전문 과학기술인으로 시작해 국회의원, 이후 기관장으로 선임된 인사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치·정책 분야까지 확장했다. 민 원장은 1959년생으로,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이 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일본 규슈대에서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하다 1991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최초의 여성 유치 과학자로 입소했다. 이후 20년 동안 국내 원자력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과 한국원자력학회장도 역임했다. 지난해 9월부터 KIAT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민간 주도 성장 전략을 뒷받침할 정책을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