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0년 어느 날, 원전 내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포화가 초읽기에 들어가지만, 원전지역 주민의 동의를 받지 못해 건식저장시설을 확충하지 못한다. 결국 저장시설 포화로 한빛원전을 시작으로 국내 원전이 차례로 멈춰서고, 전력 의존도가 높은 반도체·철강 등 주요 산업은 물론, 자영업자와 일반 국민 모두가 에너지 대란에 시달린다. 급기야, 방폐장 없이 원전 내에 쌓여만 가는 사용후핵연료를 수십 년째 바라보는 지역 주민의 불만은 더욱 커지고, 청년들은 “원자력의 혜택을 누린 부모 세대는 방폐장 문제를 왜 우리에게 떠넘기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누군가는 정부가 극단적인 디스토피아를 가정해 공포를 조장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이 제때 제정되지 못하면, 우리에게 닥칠 개연성 높은 미래라는 점이다. 전문가, 미래세대, 원전 지역 지자체·주민은 물론, 에너지 백년대계를 걱정하는 많은 이들이 이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 원전운영국의 당연한 책무
원자력의 부산물인 방사성폐기물인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열과 방사능 준위가 높아 위험도가 높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로 나뉜다. 원전에서 사용한 방호용품이나 기자재·부품 등이 중·저준위 방폐물, 원자력 발전에 사용된 우라늄 연료, 즉 사용후핵연료가 고준위 방폐물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중·저준위 방폐물은 2015년부터 운영에 들어간 경주 방폐장으로 이송해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지만, 아직 고준위 방폐장 부지선정 절차조차 시작하지 못한 상태다.
고준위 방폐장이 없다 보니 원자력 발전의 필연적인 부산물인 고준위 방폐물은 지금 이 시각에도 원전 내에 쌓여만 가고 있다. 1978년 고리원전 1호기 상업운전이 시작된 이래 국내 원전에 쌓인 고준위 방폐물은 1만8900톤에 달한다. 원전에 대한 정책이나 정치 기조와는 무관하게, 원자력의 혜택을 누린 현세대가 오롯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이처럼, 사용후핵연료가 갈 곳을 찾지 못하면서 원전지역 주민은 현재 원전 내 저장시설이 사실상 방폐장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원전 지역 지자체·의회·주민은 지난해에만 9차례 성명서 발표를 통해 '부지 내 저장시설의 영구 방폐장화 우려 해소를 위한 고준위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정부와 국회가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고준위 방폐장 확보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주요 원전운영국과 비교해도 크게 뒤처진다. 핀란드는 인허가 심사가 지연되고는 있지만, 2025년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폐장 운영을 개시할 계획이며, 스웨덴은 2022년에 고준위 방폐장 건설허가를 취득했다. 프랑스는 작년 1월에 건설허가를 신청했고, 중국·러시아 등 주요국도 방폐장 부지는 확보한 상태다. 특별법 제정과 부지선정 절차 착수를 위한 노력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다.
◆ 고준위 방폐장 확보를 위한 40년의 노력
고준위 방폐장 확보를 위한 노력도, 특별법 제정을 위한 시도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부는 1980년대부터 9차례에 걸쳐 방폐장 부지확보를 위한 노력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부지선정 과정에서 안면도(1990년), 굴업도(1994년), 부안(2003년) 등 후보 지역 주민들은 법적 절차 없이 추진한 부지선정을 '밀실 행정'으로 비판했고, 유치지역 지원 약속도 정부가 바뀌면 뒤집힐 수 있다며 신뢰하지 않았다. 이 같은 실패의 아픔을 겪으며, 정부는 국민 신뢰에 기반을 둔 객관적인 부지선정을 위해서는 별도의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국민도 특별법 제정을 원했다. 박근혜(2015년)·문재인(2021년) 정부에서 두 차례 실시한 공론화에 참여한 6만1000명의 전문가, 지역 주민, 일반 국민은 고준위 방폐물의 안전한 관리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권고했다.
법제화의 필요성을 인지한 정부와 국회는 그간 꾸준히 특별법 제정 노력을 기울여왔다. 20대 국회에서 정부(2016년)와 우원식 의원(2018년)이 고준위 방폐물관리 특별법, 신창현 의원(2016년)이 중간저장시설 부지선정법을 발의했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채 자동폐기되고 말았다.
◆ 21대 국회, 특별법 제정의 최적기
이번 21대 국회 들어서도 고준위 특별법안 3건과 방사성폐기물관리법 전부개정안 등 총 4건의 법안이 발의됐다. 특히 여·야가 각각 2건씩 법안을 발의하며, 정파를 떠나 원전의 안정적 운영과 사용후핵연료의 안전한 관리를 위해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데 공감대를 이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특별법안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회 상임위 법안소위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2022년 11월부터 작년 11월까지 1년 동안 11차례의 법안 심의와 입법 공청회를 진행하며 이견을 좁힌 결과 10개의 쟁점 중 8개를 해소하고, 이제 2개의 쟁점만을 남겨두고 있다. 여·야와 정부가 함께 노력 중인 만큼 조만간 전향적인 합의점 도출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 특별법 제정, 국회·국민의 지지가 필요한 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21대 국회 회기가 종료되는 5월 말이면 법안은 자동 폐기된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여·야와 정부가 함께 노력한다면, 지난 40년을 끌어온 국가적 난제를 21대 국회가 협치를 통해 해결했다는 성과를 남길 수 있다. 특히, 특별법은 원전 확대나 탈원전과 같은 원전 정책의 방향을 정하는 법이 아니라 고준위 방폐장 부지선정을 위한 절차법인 만큼 여·야의 대승적 합의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더욱이 이번에 법안이 폐기되더라도 원전 포화가 임박하면서 결국 특별법 제정 이슈가 가까운 시일 내 재점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야 모두의 입장에서도 쟁점 합의를 눈앞에 둔 지금이 법안 제정의 최적기다.
동시에,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을 위해선 국민의 관심과 지지도 필수다. 국민 여러분도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믿고, 고준위 특별법 제정에 마지막까지 힘을 보태주시길 부탁드린다.
최남호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
〈필자〉산업부에서 30년가량 산업·에너지 정책을 두루 섭렵한 정통 관료다. 최 차관은 1995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 그 해 행정고시 38회로 공직에 입문해, 방사성폐기물과장, 자동차항공과장, 기획재정담당관, 에너지자원정책관, 시스템산업정책관, 산업정책관, 기획조정실장 등 주요 핵심 보직을 맡았다. 산업·에너지 정책 전문성을 바탕으로 뛰어난 소통 능력이 강점인 최 차관은 고위공무원 승진 이후 산업부 대변인을 두 차례 맡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올해 1월부터 산업부 2차관으로서 에너지정책을 총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