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선]의료 산업 혁신, 멈춰선 안된다

전공의들이 집단으로 병원을 떠난 지 한 달 반 가량 지났다. 이들을 가르치던 의과대학 교수들도 집단 사직에 동참하면서 의정 갈등은 퇴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피해는 환자들이 받고 있다. 병원들이 외래, 수술을 최대 절반가량 줄이면서 갈 곳이 없어진 중증 환자들은 2차 병원이나 동네 병원을 전전하고 있다. 의료계는 환자 피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사죄한다면서도 이 같은 결과를 낳게 한 정부에게 책임을 돌리고만 있다.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발해 병원을 떠난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의 집단사직마저 가시화되면서 의료 현장의 혼란이 가중될 전망이다. 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김민수기자 mskim@etnews.com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발해 병원을 떠난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의 집단사직마저 가시화되면서 의료 현장의 혼란이 가중될 전망이다. 서울 시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김민수기자 mskim@etnews.com

의사 집단행동에 말 못 하는 피해자들도 점차 늘고 있다. 바로 의료 산업을 이끌고 있던 기업들이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길어지면서 사업에 직접적인 영향까지 받고 있다. 한 해의 시작인 1분기가 곧 마감이지만 실적은 물론 연간 사업계획에 차질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곳은 제약사나 의료기기 기업이다. 수련병원인 대형병원들이 외래와 수술을 최대 절반가량 줄인데다 입원 병동까지 통폐합에 나서면서 병원에 공급하는 의약품과 의료기기가 대폭 줄었다. 거즈나 붕대 등 의료 소모품을 시작으로 입원 환자에 필수인 수액, 고가 항암제 등 의약품까지 모두 작년 대비 20~30%가량 줄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 전언이다.

제약·바이오, 의료기기 기업들이 병원과 밀접하게 진행하던 임상시험도 직격탄을 맞았다.

당직이나 진료를 지원하던 전공의들이 90% 이상 병원을 떠나면서 교수들이 기존 진료나 수술 외에 전공의 업무까지 떠맡으면서 임상시험도 급속도로 줄고 있다. 사실상 '번아웃'에 이른 교수들이 임상시험까지 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임상시험은 의약품이나 의료기기 유효성·안전성을 입증할 핵심 단계다. 이 과정이 미뤄질 경우 제품 개발 일정까지 미뤄질 수밖에 없다. 현재 주요 대학병원 임상시험 중단율은 약 20~30%로 추산된다. 희귀·중증질환자들은 임상시험을 통해 치료 효과를 기대하거나 한시라도 빨리 출시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의사 집단행동으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정용철 기자
정용철 기자

병원들도 입원·수술 환자들이 크게 줄면서 하루 최대 10억원 넘게 수입이 줄고 있다. 이것도 걱정이지만 당장 해야하는 중요 과업을 못하게 된 것도 속이 탄다. 대표적인 사례가 ICT 혁신 추진이다.

최근 병원들은 환자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고, 내부 비용 절감과 효율성 증대를 위해 ICT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다. 올해도 많은 대형병원이 '비욘드 스마트병원' 도약을 위해 ICT 투자를 예고했다. 환자 예약이나 진료 시스템 고도화, 의료진을 위한 차세대 병원 정보시스템 구축, 행정업무 혁신을 위한 인공지능(AI) 시스템 도입, 전 병원 정보시스템 모니터링 체계 도입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예고했지만 대부분 중단된 상태다.

의료·헬스케어 산업은 환자 생명과 연관되는 만큼 꾸준히 육성해야 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의료 산업 육성과 병원 혁신이 멈췄다. 하루 빨리 갈등의 고리를 끊고 의료 산업계와 병원, 이들을 지원할 정부까지 멈춰선 의료 산업 혁신 시계추를 다시 돌려야 한다.

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