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19〉88서울올림픽 유치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1988 올림픽개최지로 대한민국 서울이 발표되자 박용수 서울시장(가운데)을 비롯한 한국 올림픽 위원회 대표단이 환호하고 있다. 앞쪽은 일본 올림픽위원회 대표단.1981.09.30(바덴바덴=연합뉴스)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1988 올림픽개최지로 대한민국 서울이 발표되자 박용수 서울시장(가운데)을 비롯한 한국 올림픽 위원회 대표단이 환호하고 있다. 앞쪽은 일본 올림픽위원회 대표단.1981.09.30(바덴바덴=연합뉴스)

“서울이냐 나고야냐?”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장. IOC는 이날 오전 9시부터 낮 12시 30분까지 총회를 열었다. 이어 IOC 규정에 따라 한국과 일본은 올림픽 주최 계획과 준비 상황을 1시간씩 소상하게 설명했다. 30분은 올림픽 계획, 30분은 질의응답으로 진행됐다. 피말리는 시간이었다.

IOC는 오후 2시부터 88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비밀투표를 시작했다 투표에는 82명의 IOC 위원들이 참여했다.

오후 3시 45분(한국시간 밤 11시 45분). 긴장한 표정의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개최지 발표를 위해 단상에 섰다. 40억 세계인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쏠렸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사마란치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셰울 꼬레아!” 순간 장내는 경악과 환호로 갈렸다. 서울 52표. 나고야는 27표였다. 압도하는 표 차이였다.

유치단장인 박영수 서울시장 등 한국대표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서로 얼싸안았다. 세계를 놀라게 한 바덴바덴의 기적이었다.

이 시간. 국내에서도 전 국민이 이 장면을 TV로 지켜봤다. 유치 결정에 모든 국민이 환호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 “우리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참으로 벅찬 감회를 누르기 어려웠다. 내가 현지에 있었다면 나도 벌떡 일어나 만세를 외쳤을 것이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우리는 세계 16번째 올림픽 개최국이 된 것이다. 올림픽 유치에 나선 공직자들과 나라의 어려운 일에 흔쾌히 뛰어들어 헌신적으로 노력해 준 기업인들에게 고개가 숙여지도록 고마움을 느꼈다.”(전두환 회고록2)

정부가 처음 올림픽 유치를 결정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다.

올림픽을 유치해 개발도상국에서 경제와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4월 18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준공식 만찬장에서 올림픽 유치 구상을 처음 밝혔다. 박 대통령이 정상천 당시 서울시장에게 말했다.

“정 시장, 서울시 1년 예산이 얼마나 되나?”

“6000억원 정도 됩니다.”

“6000억원이면 됐다. 임자, 올림픽 한번 해보지?”(서울시 자료집 '임자 올림픽 한번 해보지')

박정희 대통령의 이 말 한마디가 88서울올림픽 유치의 출발점이었다.

1979년 9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으로 88서울올림픽 유치 계획을 재가했다.

이어 정부는 서울시장과 대한체육회장 공동명의로 '88서울올핌픽 유치 의향서'를 IOC에 제출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그해 10·26 사태로 서거하고 5공화국이 등장하면서 한동안 올림픽 유치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IOC 측에서 한국에 “올림픽 유치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부랴부랴 유치전에 나선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증언. “올림픽 유치는 이미 박정희 대통령이 재가까지 한 계획이었다. 대통령이 결정한 사안을 뒤집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변경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더욱이 역사적 과업을 추진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패배 의식에 젖어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울시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81년 2월 26일 IOC에 유치계획 신청서를 제출했다.

정부는 제24회 올림픽경기 개최에 필요한 모든 재정과 행정 지원을 서울시에 제공할 것을 보증하는 대통령 명의의 보증서를 사마란치 IOC 위원장에게 보냈다.

3월 30일과 4월 4일 국가올림픽위원회(NOC), IOC 조사단이 각각 내한해서 서울올림픽 개최 가능성을 점검했다. 이들은 각종 경기 시설과 숙소, 프레스센터 등을 돌아봤다.

정부는 4월 8일 정부 조직을 개편하고 정무장관실을 신설했다. 정무장관실은 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관계부처와 대한체육회 활동을 담당했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 유치에 대해 반대 의견이 다수였다.

4월 16일 정부는 남덕우 국무총리 주재로 제1차 올림픽대회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안전기획부 부장, 경제기획원 장관, 외무부 장관, 문교부 장관, 서울시장, IOC 위원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 다수는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유치를 반대했다. 올림픽 주무장관인 이규호 문교부 장관 등 일부만 찬성했다. 4월 27일 열린 2차 회의에서도 반대 주장이 주류였다. 그러다가 5월 16일 열린 3차 회의에서 기류가 변했다. “노력도 하지 않고 유치 활동을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유치 활동을 계속해서 최종 표결 직전에 결론을 내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정부는 거국적으로 올림픽 유치에 나섰다.

그해 5월 정부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올림픽유치위원장으로 위촉했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등 기업 총수들도 총동원했다.

정주영 회장이 자서전에서 밝힌 내용. “위원장 임명은 나와 사전에 일언반구 논의도 없었다. 유치 도시 시장이 맡는 유치추진위원장을 민간 경제인에게 맡긴다는 유례없는 결정을 한 것이다. 올림픽 유치 관계장관회의에서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유치위원장을 민간 경제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제안해 결정한 일이었다고 한다.”(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회장이 남긴 어록 가운데 대표적인 게 “이봐, 해봤어?”였다. 정 회장은 이 말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한 올림픽 유치 주역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7월 16일 노태우 전 국군보안사령관을 정무장관에 임명했다. 노태우 장관은 전두환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로, 사단장과 수도경비사령관·군국보안사령관을 역임하고 육군대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정권 2인자로 불렸다.

전두환 대통령은 9월 3일 청와대 안보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올림픽을 반드시 유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노태우 장관을 유치 활동의 지휘책임자로 지명했다.

노태우 장관은 9월 4일 각 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올림픽 유치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부처별 활동 내역을 구체화해서 정했다. 외무부는 재외 공관에 각국 IOC 위원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라는 훈령을 내렸다.

9월 11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무총리실이 마련한 88올림픽 유치 종합대책을 재가했다.

이 대책에서 정부는 대회 성격을 △화합 축제 △역대 최대 규모 △개발도상국 시범 대회로 개최키로 했다.

부처별 역할도 분담했다. △총리실:각 부처 추진계획을 종합 조정 △경제기획원:투자사업 연차별 계획 조정 △내무부:올림픽새마을운동 전개 △체신부:국내외 중계시설 증설과 통신시설 서비스 향상, 올림픽 데이터통신망 운영 △과학기술처:경기운영 과학기술 개발지원, 한국과학기술원 전산시설 활용계획, 기상 제공 등이었다.

9월 24일 정부는 서울올림픽 유치단을 독일 바덴바덴 현지로 파견했다. 단장은 개최도시 시장인 박영수 서울시장이 맡았다. 정주영 올림픽추진위원장, 조상호 대한올림픽위원장, 유창순 한국무역협회장,이원경 KOC 상임고문, 이원홍 KBS 사장 등 공식 대표단 6명과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등 30명의 유치교섭단 및 실무지원단 등 모두 106명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이보다 앞선 9월 15일 출국해 영국과 벨기에 등지에서 유치 활동을 하고 20일 바덴바덴에 도착했다. 정주영 회장은 출발 전 현대 프랑크푸르트 지점에 긴급 전문을 보내어 현대 직원과 가족들이 바덴바덴으로 와서 올림픽 유치를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현지에서 정주영 회장의 활동은 초인적이었다. 우선 각국 IOC 위원이 묵는 호텔방으로 꽃바구니를 보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이어 날마다 새벽과 밤 늦게 일일 표 점검을 했다.

정주영 회장의 회고록 증언. “조상호 대한체육회장과 최만립 총무 등 몇몇 인사와는 매일 새벽 6시와 밤 10시에 모여 일일 점검을 했다. 우리 경제인들도 자기 주머니 돈을 쓰면서 참으로 열심히 활동했다.”(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은 남미나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 IOC 위원들에게 부부초청 무료 왕복 비행기표를 보냈다. 그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현지 여론은 일본 나고야가 월등하게 우세했다. 총회 전날인 29일 각국 기자단 모의투표에서도 나고야가 앞섰다. 대세가 나고야로 기운 듯 했다. 한 특파원은 '서울과 나고야'를 놓고 정주영 회장과 20달러 내기를 했다. 투표 결과는 서울 승리였다. 20달러는 정주영 회장이 가졌다.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는 내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고 기쁜 일이었다”고 밝혔다.

정주영 회장은 주위 인사들에게 말했다. “이봐, 해보니까 유치했잖아.”

정성을 다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준 쾌거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