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시스템의 성능은 대부분 하드웨어(HW)의 물리적 능력에 의해 결정됐다. 좋은 하드웨어는 곧 좋은 성능을 의미했고, 소프트웨어(SW)는 이를 보조하는 수단에 머물렀다.
당시 성능 비교는 단순했다. 반도체의 경우 집적도가 높을수록, CPU는 클럭 속도가 빠를수록 더 우수한 제품으로 평가받았다. HW가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대에는 성능을 높이는 방법 또한 명확했다. 성능 향상을 위해서는 장비를 새로 만들면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적었던 만큼 성능 향상의 과정은 단순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상황은 급격히 변했다. 인터넷, 클라우드, 스마트폰,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SW 정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는 동일한 HW를 사용하더라도 어떤 SW를 적용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성능을 낼 수 있다. HW 자체보다 설계와 최적화의 방식이 성능을 좌우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HW의 기술 수준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성숙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국방 무기체계 분야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분명하다. 과거 레이더의 성능은 안테나, 송수신기와 같은 HW가 대부분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제는 소프트웨어정의레이더(SDR)가 주류다.
다기능 능동 위상배열 안테나(AESA)가 탐색·추적·유도 기능을 단일 HW 내에서 수행하는 수준을 넘어, 통신과 전자전(EW) 기능까지 통합하려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동일한 장비라도 SW 설정에 따라 운용 환경과 임무 목적에 맞게 기능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다양성이 곧 성능 향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스템의 복잡성이 커지면서 최종 성능이 제자리걸음하거나, 심지어 후퇴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가 말한 '선택의 역설'이 기술 시스템에 나타난 사례라 할 수 있다.
최신 레이더는 수십가지 운용 모드와 파라미터를 제공하지만, 그만큼 운용자의 혼란도 커질 수 있다. 긴급 상황에서 어떤 설정을 사용해야 할지 판단이 늦어져 오히려 대응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SW가 제공하는 선택의 다양성이 반드시 성능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례는 곳곳에서 확인된다. 선택의 풍요가 성능 향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사용 목적에 맞는 최적화 능력, 즉 '무엇을 버릴지 결정할 줄 아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풍요로운 선택 속에서 본질을 파악하고 불필요한 옵션을 과감히 덜어내는 능력, 그것이 진정한 성능 향상의 출발점이다.
대학의 교육도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단순히 많은 언어와 프레임워크를 다룰 줄 아는 기능형 인력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 속에서 문제의 본질을 정의하고 최적의 해법을 설계할 수 있는 창의적 설계자를 양성해야 한다.
정보기술(IT)과 AI 기술로 과거에 비해 정보를 얻고 다룰 수 있는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빨라졌지만 인간의 '사고 속도'가 빨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정보의 범람 속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선별하는 능력, 본질을 꿰뚫는 사고의 깊이가 더욱 절실한 시대라고 생각된다.
SW 정의 시대는 기술의 풍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선택의 복잡성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진정한 성능 향상은 더 많은 기능이나 더 빠른 속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단순화와 본질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기술자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불필요한지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스스로 '가치 있는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사고 훈련이 필요하다. 기술의 복잡함 속에서 단순함을 찾아내고, 풍요로운 가능성 속에서 본질을 설계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이들이야말로 SW 시대의 진정한 리더가 될 것이다.
김은희 세종대학교 교수 eunheekim@sejo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