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냉장고와 세탁기 등 가전 제품 1대를 판매하기 위해 관리해야 할 정보가 급증할 전망이다. 철강과 플라스틱, 냉매의 탄소배출량 뿐만 아니라 압축기와 제어기판을 분해·교체할 수 있는 지, 예비부품을 몇 년간 공급하는 지, 수리설명서와 소프트웨어를 언제까지 지원하는 지도 입증해야 한다.
유럽연합(EU)의 에코디자인(ESPR) 규정과 디지털제품여권(DPP), 수리용이성 규제가 동시에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전업체의 규제 대응 비용이 제품 설계부터 판매 이후 사후서비스(AS)까지 확대가 불가피하다. 판매 이후에도 부품과 수리망, 관련 데이터를 장기간 유지해야 해 수익성이 낮은 제품일수록 규제 대응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에너지효율에서 제품 생애주기로 확산하는 환경 규제
ESPR은 EU가 2019년 신성장전략으로 제시한 유럽 그린딜을 실행하기 위한 기본규정이다. 기존 에코디자인 지침이 가전 등 에너지 관련 제품의 에너지효율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면 ESPR은 적용 범위를 철강·알루미늄 등 중간재를 포함한 대부분 물리적 상품으로 넓혔다. 내구성과 재사용성, 수리·업그레이드 가능성, 재활용성, 재생원료 함량, 탄소·환경발자국까지 포함시켰다.
국가기술표준원 TBT종합지원센터는 ESPR을 “제품 설계 단계부터 사용·수리·재사용·재활용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지속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내재화하려는 EU의 새로운 제품정책 프레임워크”로 분석했다. 전기를 적게 쓰는 것을 넘어 오래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자원으로 돌릴 수 있는 제품을 만들라는 규제로 확대된 것이다.
개별 제품에 적용할 실제 기준은 개별 법률에서 규정한다. EU의 2025~2030년 작업계획에 따르면 철강 위임법은 올해, 섬유·의류와 타이어·알루미늄은 2027년, 가구와 냉장·냉동기기는 2028년 채택이 목표다. 가정용 세탁기와 식기세척기 관련 규정은 올해 채택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제품 자체가 충족해야 하는 '성능 요건'과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제공해야 하는 '정보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성능 요건에는 제품별 내구성·수리용이성·재활용성 최저기준 등이 포함된다. 정보 요건에는 부품과 소재, 탄소발자국, 수리·재활용 방법 등 소비자와 수리업체, 규제당국에 제공해야 할 정보가 담긴다. 지난달부터 가동된 DPP에 ESPR이 규정한 성능과 정보를 담아야 하는 것이다.
DPP는 제품이나 모델·배치에 고유 식별번호를 부여해 QR코드 등을 통해 관련 데이터에 접근하도록 한 디지털 증명서다. TBT종합지원센터는 무역기술장벽이 기존의 '물리적 장벽'에서 '데이터 장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업은 제품 성능을 시험하고 인증받는 데 그치지 않고 공급망 전반에서 발생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갱신해야 한다.
![[이슈플러스]에코디자인·DPP 동시 압박…가전업계 “판매 이후가 더 부담”](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6/08/17/news-g.v1.20260817.2623ef5f246e4043a1615b8e58f3d7a9_P1.jpg)
◇수리부품 가격·배송기간까지 규제
가전업체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항목은 수리용이성이다. ESPR은 각 제품 단위 요구사항과는 별도로 여러 제품에 공통 적용할 수 있는 '수평적 요구사항'을 도입할 예정이다. 예비부품 공급과 분해 방식, 수리정보 제공 등 공통 항목을 묶어 적용하는 방식이다.
TBT종합지원센터에 따르면 현재 EU 공동연구센터(JRC)는 수리용이성과 관련해 세부 항목 16개를 최종 후보로 압축한 단계다. 예비부품 공급기간과 배송기간·가격, 수리정보 제공,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분해에 필요한 공구와 고정장치, 공장 초기화와 데이터 삭제 기능 등이 포함됐다.
예비부품은 제품 출시 이후에도 최소 5년을 공급하고, 주문받은 부품은 7영업일 안에 배송하도록 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가장 비싼 예비부품의 가격은 제품 세전 표시가격의 30%를 넘지 않도록 하는 등 세부적인 요건이 폭넓게 논의되고 있는 단계다.
소프트웨어와 펌웨어, 운영체제 업데이트 역시 제품 출시 종료 이후 최소 5년간 무상으로 제공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부품 운영과 가격정책까지도 규제 영역으로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부품 가격이 수리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인 만큼 EU는 가격 상한과 공개 의무도 검토하고 있다.
수리용이성 개념은 결국 제품 구조에도 영향을 준다. 소비자가 직접 교체할 수 있는 부품은 제품을 파손하지 않고 기본 공구로 분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접착제와 일체형 구조를 줄이고 재사용하거나 다시 공급할 수 있는 나사·패스너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문 수리업체에는 회로도와 부품 목록, 진단 방법, 단계별 수리지침 등을 제공하는 방안도 논의된다.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설계 자체를 변경하거나 내부 조직을 확대할 수 밖에 없다. 설계부서는 주요 부품을 교체할 수 있도록 제품 구조를 바꿔야 하고, 구매부서는 단종 이후까지 부품 공급을 보장할 협력사를 확보해야 한다. 서비스부서는 국가별 부품 재고와 수리망을 운영해야 하는 셈이다. 소프트웨어 부서 역시 단종 제품의 보안·기능 업데이트를 장기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이 추가된다.
규제 대응은 가전업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완제품 DPP를 구축하려면 철강과 알루미늄, 플라스틱, 전자부품 등 공급망을 따라 생성되는 정보가 단계별로 연결돼야 한다. 중간재에 적용된 에코디자인 정보가 자동차와 가전, 기계 등 최종제품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EU 수출 대응 넘어 국내 제도화…산업계 “속도 너무 빠르다”
EU발 제품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국내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4월 '에코디자인포럼'을 출범하며 한국형 에코디자인 제도 도입 절차에 착수했다. 섬유·의류, 타이어, 전기·전자, 철강·알루미늄, 녹색전환 기반시설을 우선 검토하고 올해 일곱 차례 포럼을 열어 세부 제도를 마련할 계획이다.
한국형 에코디자인이 도입되면 품목별 기준이 마련된 제품은 재생원료 사용량과 탄소·에너지 효율, 재활용을 방해하는 소재·구조 등을 의무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관련 환경성능 정보도 DPP를 통해 전자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이 검토된다. 지금까지 기업이 자율적으로 참여하던 환경성적표지와 달리 기준이 설정된 제품에는 의무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산업계가 우려하는 것은 도입 속도다. EU 수출을 위해 필요한 규제 대응과 이를 국내에서 판매되는 제품 전체에 의무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지적이다. 유럽 시장과 거래하지 않는 중소기업까지 제품 설계와 공급망 데이터, 수리·재활용 체계를 새로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EU 시장 진입을 위해 치르던 비용이 국내에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기본비용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후공시를 둘러싼 논란이 제품 규제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은 기후공시 규정 폐기를 위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반면 한국은 2028년 의무공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국제 규제 방향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이 유럽 기준을 앞서 받아들이면 국내 기업만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업계 관계자는 “그간 산업부를 중심으로 EU 수출 규제 대응과 업종별 데이터 표준화 준비를 진행해 왔지만 정부 조직개편 과정에서 소관 부처가 넘어가면서 지나치게 제도화를 서두르는 느낌이 적지 않다”며 “EU 규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방향에는 공감하지만 기업의 데이터·인증 기반이 갖춰지기 전에 국내 의무화부터 서두르면 수출 대응을 위한 제도가 오히려 국내 기업의 추가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류근일 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