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대한민국 사진백서'가 발간되어 사진산업의 규모와 종사자 현황뿐 아니라 분야별 시장 변화, 기술과 연구개발(R&D), 교육과 일자리, 저작권, 해외시장과 정책 전망까지 한 해 동안 대한민국 사진산업에서 일어난 변화가 한 권에 담겨 있다면 사진가에게 이 백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백서를 발간하는 목적은 한 해의 사진산업을 기록하는 데만 있지 않다. 정부는 백서를 통해 정책을 점검하고 새로운 사업을 설계할 것이며, 국회와 관계기관도 예산과 제도를 검토하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백서의 가치는 정부와 정책기관에서 더 나아가 사진가와 기업, 학생과 대학이 백서에서 자신의 다음 선택을 찾아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산업 전체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사진가는 수백 쪽에 달할 수도 있는 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든 내용을 공부하듯 읽을 필요는 없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출발해 '내 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변화는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그곳에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경험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읽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지역에서 30년 가까이 사진관을 운영해 온 사진가를 생각해 보자. 한때는 사람들이 증명사진과 가족사진, 돌사진과 졸업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사진관을 찾았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학교와 기업의 촬영방식이 바뀌면서 과거와 같은 수요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사진관 주인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해 왔지만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는 막막하다. 사진백서에서 자신의 업종 매출이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다면 백서는 이미 알고 있던 어려움을 숫자로 확인해 주는 책에 불과하다.
백서를 펼쳤을 때 상업사진 분야의 매출과 기업 발주가 몇 년째 감소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면 자신이 느끼던 어려움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구조의 변화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책을 덮어서는 안 된다. 백서의 장점은 하나의 시장을 다른 산업의 변화와 연결해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조금 뒤의 기술동향과 산업융합 부분에서 기업의 제품 이미지가 단순 광고촬영에서 전자상거래용 대량 이미지, 3차원 제품 데이터, AI 학습용 이미지, 디지털 카탈로그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이 사진가는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광고사진이 줄어드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기업이 이미지에 쓰는 돈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이 가진 경험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제품사진가는 오랫동안 정확한 색과 재질을 표현하고, 조명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동일한 조건으로 수십 개의 제품을 반복 촬영하고, 대량의 원본을 관리하는 일을 해왔다. 광고사진 시장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능력이지만 AI시대 이미지 데이터 시장에서는 사진의 품질을 프리미엄화 하고 일정하게 유지하는 전문성이 될 수도 있다.
사진 관련 중소기업이라면 백서의 R&D 장을 전혀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미지 진본성과 출처 확인이 세계적인 기술과제로 부상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관련 기술과 전문기업이 부족하다는 분석이 실렸다고 가정해 보자. 장비를 판매하거나 사진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온 기업이라면 이것을 단순한 기술뉴스로 넘길 이유가 없다.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해외에서는 어느 수준까지 개발됐는지, 국내에서는 어떤 연구가 부족한지를 확인한 뒤 대학이나 연구기관, 사진가와 협력해 새로운 연구과제를 제안할 수 있다. 촬영단계에서 원본의 출처를 기록하는 기술이나 이미지의 수정 이력을 관리하는 서비스, AI 생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 등이 사업 가능성이 있는지 검토할 수 있다. 정부 R&D 과제를 신청할 때도 “앞으로 필요할 것 같다”는 주관적 일방적 주장 대신 국가 백서에서 확인된 산업 문제와 기술격차를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백서가 가진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개별 기업이 혼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산업 전체의 문제를 보여주고, 그 문제를 연구와 사업의 주제로 바꿀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대학과 학생에게는 또 다른 페이지가 중요하다. 사진학과 교수라면 백서의 교육·인력 부분에서 졸업생들이 실제 어느 분야로 진출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볼 수 있다. 전통적인 촬영 직무의 취업은 줄어들고 있는데 산업 이미지, 디지털 아카이브, 이미지 데이터 관리 등으로 진출하는 졸업생이 늘어난다면 교육과정도 그 변화를 따라갈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사진학과가 촬영교육을 버리고 컴퓨터학과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진가에게 필요한 빛과 색, 이미지 구성, 촬영과 기록에 대한 기본교육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그 기본기를 어떤 새로운 산업과 연결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백서에서 산업의 변화를 확인한 뒤 필요한 분야의 기업과 산학협력을 만들고, 학생들이 실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하며, 기존 교육과정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추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백서는 대학이 5년 뒤 학생들에게 어떤 직업을 준비시켜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자료가 된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진가에게는 전국 평균보다 지역산업 분석이 더 유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제조업의 디지털 전환 투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내용이 백서에 담겨 있다면, 전국적인 사진공모사업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지역 제조기업이 어떤 이미지와 기록을 필요로 하는지를 조사해 볼 수 있다. 생산공정 기록이나 기업 아카이브, 제품 데이터 구축 등에서 사진가의 기술이 활용될 여지가 있는지 현장을 찾아가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가 하나 생긴다. 미래의 사진가는 산업의 문제를 먼저 발견하고 사진으로 해결책을 제안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 “사진 관련 사업이 있으면 불러 달라”는 방식에서 “이 산업에 이런 변화가 있고, 여기에 사진기술을 이렇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안으로 바뀌면 고객과 사진가의 관계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백서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직업의 이름도, 시장의 이름도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사회가 곧 필요로 하게 될 영역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성형 AI를 예로 들어보자. 백서에서 AI 생성 이미지가 급증하면서 이미지의 출처와 진본성, 신뢰 문제가 새로운 사회적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고 하자. 대부분은 이를 사진가에게 불리한 기술 변화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새로운 시장의 신호일 수도 있다.
AI로 실제와 구별하기 어려운 인물사진을 만들 수 있다면 여권이나 각종 신원 확인용 사진에서는 실제 본인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보험사고나 시설물 점검 사진을 쉽게 수정할 수 있다면 증빙용 사진의 원본은 누가 관리하고 촬영 사실은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공공기록에서 AI 생성 이미지와 실제 기록사진을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아직 완성된 산업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진계가 먼저 연구할 가치가 있다. 백서가 사회와 기술의 변화를 제대로 분석한다면 사진가는 그 속에서 이미 만들어진 일자리뿐 아니라 앞으로 사진가가 맡아야 할 새로운 역할까지 발견할 수 있다.
결국 백서를 읽는다는 것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신호를 다른 사람보다 조금 먼저 발견하는 일이다. 기술동향을 함께 보고, R&D와 해외사례를 연결하며, 교육과 정책의 변화를 동시에 살펴볼 때 한 장의 통계가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로 바뀔 수 있다. 사진가는 백서를 읽으면서 세 가지를 연결해야 한다. 지금 내가 가진 경험, 산업이 움직이는 방향,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이 세 가지가 만나는 곳에서 새로운 직업과 시장이 생길 가능성이 가장 높다.
사진진흥법이 제도의 문을 열고 실태조사가 대한민국 사진산업의 현재 위치를 보여준다면, 사진백서는 그 산업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읽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지도와 나침반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새로운 길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결국 자신의 경험을 어느 방향에 연결할 것인지 판단하고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현장의 사람들이다.
좋은 사진백서는 산업의 변화 속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다음 기회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 신호를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는 순간, 한 권의 백서는 새로운 직업이 되고 새로운 사업이 되며 대한민국 사진산업의 다음 시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강종진 전 사진산업진흥법제정위원회 위원장 jongjea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