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 국도를 달리다 보면 낯선 풍경과 마주한다. 논밭 한 가운데 창문이 거의 없는 회색 건물이 밤새 불을 밝히고 있다. 데이터센터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마을 어귀에는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전력 소비시설과 송전망을 둘러싼 갈등이 한 화면에 담긴 이 풍경은 지금 지역이 마주한 현실을 보여준다.
기업의 입지 선정 기준은 이미 달라졌다. 땅값과 교통 못지않게 필요한 전력을 원하는 시점에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가격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따진다. 반도체 생산공정은 순간적인 전압 강하에도 큰 차질을 빚고, 대규모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는 수만 대의 서버와 냉각설비 가동에 100㎿가 넘는 전력을 쓰기도 한다. 이제 전력은 공장을 지은 뒤 연결하는 기반시설이 아니라 기업의 입지를 결정하는 핵심 조건이 됐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전력계통영향평가 자료에 따르면 2024년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접수된 데이터센터 1차 기술검토 신청의 70% 이상이 수도권에 몰렸고, 그중 절반 이상이 공급 불가 판정을 받았다. 반면 비수도권에서는 같은 1차 기술검토 신청의 87.4%가 공급 가능 판정을 받았다. 이 격차는 나라 전체의 발전량이 부족하다기보다 수요가 몰린 수도권의 전력망에 병목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장거리 송전망 건설은 입지 선정부터 인허가까지 10년 안팎이 걸리지만, 데이터센터는 2~3년이면 짓는다. 이러한 시간 차이는 상대적으로 계통 여력이 있는 비수도권에 전력 다소비 산업을 끌어들일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관련 제도도 바뀌고 있다. 지난 6월 공포돼 2027년 3월 시행될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산업 진흥에 관한 특별법'은 요건을 갖춘 비수도권 AI 데이터센터의 계통영향평가를 면제하고 인허가를 일괄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8월 공개된 '산업용 지역 전기요금제' 설계안은 원전·재생에너지가 밀집한 남부권에 kWh당 최대 18원의 요금 인하 폭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 변화가 곧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보장하진 않는다. 평가를 면제한다고 변전소의 여유 용량이 저절로 늘진 않는다. 지역별 요금제 역시 설계 단계여서 최종 내용과 지속 기간을 장담하기 어렵다. 기업이 따지는 것은 언제 전력망에 연결할 수 있고 요금 조건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다.
그 예측 가능성은 말이 아닌 데이터로 제시해야 한다. 어느 변전소에 용량이 얼마나 남았고 언제 접속 가능한지, 공업용수와 통신망, 가용 부지, 인허가 일정과 인근 대학의 인재 공급 역량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전력·산업 가용성 지도'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기업의 투자 판단과 지역의 협상력을 높이는 핵심 근거다.
데이터센터 유치가 곧 지역산업 성장으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대형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과 용수를 사용하지만 상시 고용 인력은 적다. 전기·물·부지만 내어주고 정작 일자리와 연관 산업이 생기지 않는다면, 지역은 설비만 떠안고 부가가치는 외부로 빠져나가는 구조가 되풀이될 수 있다.
전력을 지역산업과 일자리로 연결할 조건을 초기 투자 협의 단계부터 마련해야 한다. 지역대학과 기업이 활용할 연산자원의 일정 몫, 공동 연구개발(R&D) 거점 조성, 냉각·전력기기의 지역 조달, 지역 인재 채용 계획 등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 중앙정부는 계통 여유 용량과 접속 시기, 요금 원칙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지자체는 이를 바탕으로 지역산업 연계 조건을 설계해야 한다. 정보와 권한이 함께 주어져야 지역도 선택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다. 이것이 전력 분야의 기술분권이다.
전력이 기업의 투자와 R&D, 지역 기업의 성장과 일자리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지역산업의 새로운 중력이 된다. 중력은 끌어당기는 힘인 동시에 산업과 사람을 궤도에 붙들어 두는 힘이다. 지금 지역이 답해야 할 질문은 전기를 얼마나 생산하느냐가 아니다. 그 전기를 누가 언제 사용하고, 그 위에 어떤 산업 생태계를 세울 것인가에 있다.
서용철 국립부경대 공과대학장 suh@pk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