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질병인가?]<8> “과학적 증거·합의 부족…과잉 의료화 우려” 반대 목소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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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WHO)가 이달 20일부터 스위스에서 열리는 세계보건기구총회(WHA)에서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 11차 개정안(ICD-11)을 논의한다. 게임장애 질병코드 등재 여부가 판가름나기까지 딱 2주가 남은 셈이다.

정부, 업계, 정치권, 학계를 중심으로 ICD-11 게임장애 도입저지를 위한 목소리가 최고조에 달했다. 게임산업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함께 게임장애 질병코드 도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WHO 의견 수렴사이트에 전달했다.

문체부와 한콘진은 정의준 건국대 교수의 '게임이용자 패널 코호트 조사 1~5차년도 연구'결과와 함께 현재까지 발행된 1~4차년도 보고서 원문을 참고문헌으로 포함해 의견서를 전달했다.

해당 연구는 사회과학과 임상의학 분야 패널을 각기 조사해 게임 과몰입 인과관계를 종합 규명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 한국 10대 청소년 2000명을 게임이용자 청소년 패널로 구성해 게임이 이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게임 과몰입 원인을 무엇인지 파악했다. 게임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최초 장기추적 연구로서 가치가 높다.(본지 4월 9일자 4면 참조)

문체부와 한콘진은 의견서에서 “청소년 게임 과몰입은 게임 그 자체가 문제 요인이 아니라 부모 양육 태도, 학업 스트레스, 교사와 또래지지 등 다양한 심리사회적 요인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피력했다.

임상의학적 관점에서도 게임 이용이 뇌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와 같은 질환이 있을 때 게임 과몰입 증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게임 과몰입에 대한 진단과 증상에 대한 보고가 전 세계, 전 연령층에 걸친 것이 아니라 한국·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 국한돼 있고 청소년이라는 특정 연령층에 집중돼 있는 점에 대한 문제 제기도 포함했다.

문체부는 보건복지부와 통계청을 중심으로 한 게임장애 질병코드 관련 범부처 공동연구도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찬반 등 입장이 엇갈리던 타 부처 등과 일관된 정책 협의를 이끌어 내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겠다는 방침이다.

강경석 한콘진 본부장은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화는 게임산업에 대한 극단적인 규제책으로만 작용할 뿐 게임 과몰입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며 “본 사안에 대해 학계·업계 관계자들과 유기적인 공조를 통해 게임 과몰입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확산하겠다”고 말했다.

업계를 대변하는 한국게임산업협회도 WHO 의견 수렴 사이트를 통해 게임장애 질병코드 신설에 대한 반대 의견을 재차 피력했다. 앞서 협회는 올 초에도 문체부와 WHO 실무자들을 만나 게임장애 질병 등재에 대한 우려 및 반대 입장을 전한 바 있다.

협회는 게임장애를 규정할 수 있는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게임장애는 전문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의학계나 심리학계 등에서도 명확한 결론이 전무할 정도로 깊이 있고 설득력 있는 연구가 없는 상태를 지적했다.

공존장애 가능성도 제시했다. 게임이용장애 근거로 제시되는 연구결과들은 대부분 내·외부 복합 요인에 기인한다. 대표 증상으로 제시되는 우울, 불안장애, 충동조절장애는 공존장애 비율이 매우 높다. 기타 장애가 게임 형태로 나타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진단 기준과 절차가 불투명하다는 점도 문제 삼았다. 새로운 질환을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질병분류 시스템상 임상실험에 10년에서 20년까지 충분한 기간이 필요한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전 연구나 관련 자문 내용이 없었다. 실제 ICD-11에 게임 과몰입 관련 내용을 포함토록 권장한 '주제 자문 그룹'이 WHO에 제출했어야 하는 최종 보고서도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강신철 협회장은 “이용자 성향이나 특성, 사회문화적 영향 등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나 WHO는 게임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게임을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 협회장은 이어 “과학적인 명확한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진단 기준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만큼 게임장애 질병 코드를 ICD-11에서 삭제할 것을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요청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게임장애 질병등재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정병국 바른미래당 의원은 “시대와 기술 변화를 병으로 규정하는 것은 우마차를 규제하던 과거와 다를 바 없다”며 “WHO가 게임장애를 질병코드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게임 부정인식을 극복하고자 게임포럼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 질병코드 등재와 같은 도전에 직면했다”며 “게임포럼 역시 협력하겠다”고 동참 의지를 피력했다.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은 “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코드에 편입하고 이를 국내에 적용하게 되면 주로 10대 청소년이 게임중독 진단을 받아 우울증 처방과 비슷한 약물치료를 받게 될 것”이라며 “게임에 약간 과몰입했다고 해서 약물 처방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학계는 연구결과를 공유하며 반대의견을 내고 있다. 한국게임학회가 주축이 된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 준비위원회(가칭·공대위)'가 발족했다. 게임, 콘텐츠, 문화, 영화, 예술, 미디어 등에 걸쳐 다양한 조직이 참여했다. 34개 협단체와 20개 대학이 손을 잡았다.

이경민 서울대학교 신경과 교수가 이끌고 있는 게임과학포럼은 의료화를 경고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고려할 때 게임장애가 질병코드로 설정되면 과잉진단 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며 “수익성 측면에서 이를 악용하는 의료인이 나타나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나라는 만 10세부터 65세까지 게임 이용자 비율이 70.3%에 달한다. 국민 여가 문화생활 중 게임이 3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일상 대중문화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게임장애가 질병코드로 등재되면 단순히 게임을 좋아하는 이용자와 청소년까지 질환자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이현수기자 hsoo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