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모터산업의 태동기를 일반적으로 60년대초로 보는 이유는 당시 어느 정도의 지명도를 지닌 업체들이 모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양산체제를 하나 둘갖춰 나간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기 때문이다.
AC모터분야에서는 금성사가 63년 처음으로 선풍기팬모터를 선보이면서 부산 동해공장에 조립설비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DC모터분야에서는 풍성전기가 서울 성수동에 공장을 차리고 자석없는 자동차 히터용 모터(계자코일모터)를 이무렵에 처음 만들었다.
물론 이에 앞서 청계천 장사동 등지에서는 미군부대에서 빼내거나 고물더미 에서 찾아낸 코어에 철심을 감아 훌륭한(?) 모터를 곧잘 만들곤 했다. 이들 모터는 비록 조악한 수준일 망정 당시 모터가 뿜어내는 힘에 매료돼있던 수요자들에게는 이곳이 더할나위 없는 모터 공급처였다.
나중에 보일러용모터 전문업체로 상당한 명성을 얻은 동건.금이산업.지남전자 등도 당시 청계천에서 기반을 닦은 업체들이다. 이들의 장점은 못만드는모터가 없다는 것. 각종 산업용모터를 주로 만들어냈던 이들은 코어만 구하면 어떤 규격의 모터도 하루밤만에 만들어냈다는게 당시를 회고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기억이다.
아직도 업계관계자들간에는 "특수규격의 모터는 청계천에 가야된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당시 청계천의 명성은 쉽게 짐작할수 있다.
금성사가부산동해공장에서 모터양산체제를 갖추고 생산에 들어간 선풍기모터라고 해서 청계천수준보다 특별하게 나은 것은 없었다.
생산이래야 대부분 코어.베어링.엔나멜피복선.알루미늄 인코트 등 주요부품 들을 수입해 일본제품을 복제해 조립생산하는 방식으로 이 마저도 품질안정 에 도달하는데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모터의 성능을 좌우하는 "스롯코어"를 균일하게 적층하는 기술이 없어코어의 표면은 들쭉날쭉하기 일쑤였다.
또 코어의 코팅구멍이 메꿔지지않아 생산담당자들의 애를 태우기 일쑤였다.
야근이 생활화돼 있던 당시로는 매일 야간작업조들이 모터조립은 뒷전으로한채 이들 제품들의 불량잡기에 매달려야했다.
손일봉 금성사가전모터OBU장은 "말이 양산이지 하루생산량이 10~15개정도에 불과했는데 이마저도 코어적층이 안되거나 코팅구멍이 제대로 메꿔지지 않아밤이면 줄로 코어를 다듬거나 실링제를 부어 구멍을 메꾸는 작업이 다반사로행해졌다 고 당시상황을 설명한다.
이렇게 축적된 금성사의 모터기술은 펌프모터와 믹서모터를 본격적으로 생산 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산업용모터의 효시로 볼 수 있는 펌프모터는 대리점에서 선금을 주고 사갈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곧 이어 국내 모터역사의 분수령이 될만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경제부흥을 모토로 내세운 박정희정권이 경쟁력강화를 위해 주력사업계열화 방침을 세우자 금성사는 자사생산세트와 관련이 깊은 가전용모터를 택했다.
반면 당시 산업용전문 모터업체인 한영모터를 인수해 사업확장을 추진하던효 성중공업은 자연스럽게 1마력이상의 산업용모터시장을 선택, 지금까지도시장지배능력을 잃지 않고 있다.
금성사모터사업부임원들은 이때 금성사가 산업용모터시장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현재 국내모터시장구도는 크게 변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고 있다.
여하튼가전용시장으로 방향을 잡은 금성사의 모터사업은 그때부터 국내모터 산업을 주도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선풍기모터에 이어 에어컨.세탁 기모터를 계속해서 개발했다.
여기에는 물론 70년초 일본 히타치제작소와 체결한 기술제휴가 상당한 역할 을 했다. 모터설계기술이 전무했던 국내업체로는 일본기술자들의 말 한마디 가 마치 법처럼 느껴지던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기술이전을 꺼려 모터나 장비들의 도면을 보여주지 않는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은 그때 그때 지적사항들을 받아 적는 길밖에 없었다는 것.
"하루는 너무 답답해 이들이 가져온 도면을 훔쳐 복사하기로 작정하고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연극을 꾸민 적도 있었습니다. 일본인기술자를 가능한 한 멀리 데리고 나가 식사를 하는 사이 나머지 인원은 가방을 뒤져 도면복사 를 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금성사동해공장에는 복사기라곤 단두대뿐이었고 그것도 고장나기가 일쑤여서 가슴을 조인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몇차례의 이런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기며 국내모터기술은 축적됐고 국산화의기반은 점점 넓어져 갔다는게 금성사 손OBU장이 회고하는 또 하나의 잊지 못할 기억이다.
금성사가 AC모터의 본류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모터양산 에 나선다는 점과 함께 국내모터 인력의 산실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름칠을 하며 야근을 밥먹듯이 했다는 젊은 엔지니어 가운데에는 현금 성기전의 김회수사장과 김교성 현대한가스사장을 빼놓을 수 없다. 또 후에 주 성신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성용선씨와 현재 오성사전무인 박신동씨 삼성에머슨을 거쳐 현재 효성중공업상무로 있는 최성순씨등이 바로 60년 대말부터 70년대초까지 국내모터개발을 위해 동해공장에서 땀흘린 주역들이 다. <김경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