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저성장·高리스크 시대의 기업경영

올들어 줄을 잇고 있는 매머드 기업들의 부도사태로 해당 기업이나 기업군은 물론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중견, 중소 기업들의 연쇄도산 사태가 크게 우려되면서 이로 인한 국가 산업전반의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최근의 부도양상은 과거 자금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이나 무리한 사세확장을 추진하던 신흥 재벌들과는 달리 비교적 건실하고 뿌리깊은 기업들이 쓰러지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과 그 파장은 더욱 심각하다. 이는 단순히 해당기업의 문제가 아닌 근원적인 문제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우리나라 전자부품업계에서 대표적인 「벤처기업 성공사례」로 각광을 받아 온 태일정밀이 최근 부도사태에 직면해 화의신청을 한 것은 국내 전자업계는 물론 경제계 전반에 걸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비교적 재무구조가 취약하고 계열사간 매출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 태일의 경우 몇몇 주력업체가 흔들릴 경우 그룹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 그동안에도 심심치 않게 제기돼 왔고 또 어느 정도 외형을 갖춘 이후에는 비제조업 분야에까지 계속 사업을 확장해 나감으로써 방만한 경영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시각도 없지 않았다. 태일 역시 이같은 점을 인식, 나름대로 비제조업 부분을 정리하고 제조업에 충실키로 하는 내용의 자구책을 강구하기도 했으나 이를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채 이같은 상황을 맞았다. 이는 전반적인 국내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제조업 부문 정리에 있어서 『크게 손해를 보면서 정리할 수는 없다』는 투자분에 대한 지난친 애착과 그동안 대기업들에 대해 정부가 베풀어온 「뒤치닥거리 관행」에 대한 기대심리가 밑바닥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어찌보면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기업의 욕심이자 본능이고 그 와중에서 성장하는 기업과 도태되는 기업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국가경제에 영향을 줄만한 기업들이 잇따라 좌초하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기업들이 환경이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성장시대」의 행태에 젖어있는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저돌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과감한 공격경영과 사업확장은 고성장시대에 우리 산업을 이끈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의 기술을 모방하거나 리엔지니어링하는 수준에 있던 국내 전자업체들이 무모하게 여겨졌던 D램 반도체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95년에는 세계적인 D램 품귀와 가격 상승세에 힘입어 국내 선발 반도체업체가 미국 유수의 반도체업체인 T社를 앞질러 화제와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곧바로 D램 수급이 균형을 이루고 가격 거품이 걷히면서 세계적으로 내세울 것이라고는 D램밖에 없었던 국내업체들은 모두 몇단계씩 내려 앉는 반면 반도체 전반에 걸친 기술력과 제품 구색을 갖추고 있던 T社는 상대적으로 지위가 올라가 「총체적 전력」의 차이를 절감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 역시 근본적으로는 특정 분야에 리스크를 감수하며 투자를 집중하는 성장 일변도의 투자정책의 한계를 드러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국내 전자산업 초기에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그야말로 부동산 경기가 과열될 때도 변변한 부동산 하나 제대로 확보하지 않은 채 한 우물만을 파온 탓에 외형 성장이 상대적으로 더뎌 「한물간 기업」으로 비치기도 했던 몇몇 기업들은 최근의 부도파동으로 새롭게 평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국내 산업에서의 역할과 사회적 책임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기업모델이 정립돼야 하며 정부 정책도 이에 걸맞게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정부나 업계 모두가 외형적인 고도성장에 최우선점을 두었던, 말하자면 고성장시대의 과감한 공격경영 시절의 논리로서는 저성장과 고리스크로 대변되는 지금의 위기상황을 결코 슬기롭게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 역시 다리나 건축물처럼 얼마나 빨리, 얼마나 크게 만드느냐 보다는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는 튼튼한 체질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또한 기업의 산업과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