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 해가 또 저물었다. 올해는 「경쟁력 강화만이 살 길」이라는 대명제를 절절히 실감한 한 해였다. 전자업계의 허장성세가 그대로 노출됐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올 한 해는 전자, 정보통신산업계로선 긴장의 연속이었다. 올해를 채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갑자기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는 비단 전자, 정보통신업계뿐 아니라 국가경제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특히 IMF체제가 들어서면서 유망업체들의 부도가 속출하는가 하면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이 가속화했다. 전자업계를 이끌어 왔던 굵직한 대기업과 중견업체들의 잇따른 도산은 경쟁력을 상실한 전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만한 굵직한 사건들도 적지 않은 한 해였다. 과학기술계의 최대의 숙원인 과학기술특별법이 제정돼 연구개발사업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으며 대북 전자부품 임가공사업을 개시해 남북교류 협력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국내외 전자, 정보통신 업체간에 「전략적 제휴」가 유행처럼 번진 것도 올해의 특기할 만한 변화 중 하나다. 선진국의 기술이전 기피현상이 심화되면서 독자적인 기술보다는 상호협조로 기술경쟁시대를 극복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등 부품업계를 중심으로 이뤄졌던 전략적 제휴가 컴퓨터, 정보통신, 소프트웨어업계 등으로 다변화하면서 제휴방식도 기술, 생산의 결합에서 서비스, 판매 등 마케팅 분야로 확산된것이 예년과 다른 점이다.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상거래가 올해 새로운 관심사로 부상했던 것도 특기할 만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핀란드 투르크에서 가진 「범세계 전자상거래 구현을 위한 장애물 제거」회의에서 전자상거래(EC) 확산을 위한 10대 과제를 확정했고 이에 따른 우리나라 정부와 민간 차원의 조직적인 대응체계 구축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올해 최대 이슈는 정보통신시장의 구조변화를 들 수 있다. 지난 10월 개인휴대통신(PCS) 3사의 상용서비스 개시로 이동통신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시티폰 사업자들이 사업포기 의사를 밝힌 것은 정보통신서비스사업이 더 이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님을 실감케 해 주었다. 경쟁력을 상실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시장논리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출발해 한미 통신협상을 거쳐 IMF로 마감한 97년 정보통신 정책 및 서비스 분야는 말 그대로 급격한 대내외적인 시장 환경변화를 겪었다. 특히 무려 2년 10개월간을 끌다가 지난 2월 15일 타결된 WTO협정으로 그간 눈에 보이지 않게 규제되었던 통신서비스업체의 외국인 지분이 대폭 확대됐다.
통신분야의 양대 법령인 전기통신기본법과 전기통신사업법이 올해 8월 개정되고 시행령 및 시행규칙이 잇따라 마련돼 내년의 통신시장 개방 이후 국내 통신서비스업의 구조에 대한 기본적인 룰도 세웠졌다. 이에 따라 기간통신사업에 대한 외국인의 지분이 WTO 양허일정에 따라 단계적으로 확대되며 99년부터는 외국인이 대주주가 되는 통신사업자도 생겨날 수 있게 됐다. 정부가 취해온 통신 서비스 경쟁확대 정책은 일년 내내 논란과 시비를 불러 일으키면서도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았고 1백년간의 통신독점이 허물어진 것이다. 이제 잔뜩 움츠린 어깨를 펴고 한 해를 정리해야 할 시점이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 했다. 21세기 선진기술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혜안과 집념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IMF가 남긴 97년의 신고(辛苦)를 산업 구조조정에 반영, 국제경쟁력을 획기적으로 키우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 경쟁력강화를 통해 기술보국에의 길을 기필코 닦아야 한다는 것이 전자업계가 97년 한 해 동안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얻은 소중한 교훈이다.
한 해를 냉정히 되돌아보고 다음 세기를 위한 필승전략을 짜내 과감히 실행하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