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흐뭇한 일이 생겼다. LG필립스LCD가 삼성전자에서 채택한 5세대 박막트랜지스터액정표시장치(TFT LCD)의 유리기판 규격(1000×1200㎜)을 적용키로 결정한 것이다.
사실 두 회사는 진작부터 같은 규격으로 갈 수 있었다. 삼성전자가 합의를 깨지만 않았어도 그럴 수 있었다. 애초 삼성전자와 LG필립스는 각각 980×1160㎜과 1000×1200㎜를 염두에 뒀다가 장비, 부품업체들의 규격통합 요청이 잇따르자 협의 끝에 삼성전자의 규격인 980×1160㎜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느닷없이 방향을 틀었다. 1000×1200㎜를 채택한 것이다.
LG필립스는 뒤따르자니 자존심 상하고 그렇다고 삼성보다 더 작은 규격을 따르자니 뒤질 것 같아 어찌할 바 몰랐다. 무엇보다 배신감을 참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LG필립스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다는 규격통합의 명분을 선택했다. 용기있는 결단이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또 다시 딴 뜻을 품은 게 아닌가하는 징후를 엿보인다. 1000×1250㎜ 규격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넌지시 장비업체들의 의견을 들어봤지만 거의 모든 업체가 난색을 표명했다.
되레 LG필립스는 장비업체들에 발주를 시작하는 등 발빠르게 나섰다. 삼성전자는 LG필립스보다 먼저 결정해놓고도 장비업체들의 공급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됐다.
투자부담이 큰 이 사업의 특성상 자사 제품 전략에 가장 적합한 규격을 채택하는 게 당연하다. 또 2위 업체에 추격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규격을 달리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렇지만 경쟁사가 굴욕을 참아가며, 그것도 두번씩이나 뒤따랐는데 삼성전자가 또 다시 뒤집는다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장비업체들의 반대에도 불구, 삼성전자는 새 규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눈치다.
업계는 삼성전자가 모처럼 조성되려던 공조체제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한다.
대만과 중국이 우리를 바싹 뒤쫓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세계 1, 2위 자리를 내줄 수도 있다. 내년 시장 환경도 좋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업체 혼자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가는 5세대 투자를 감당하기는 버거울 것이다. 삼성전자가 적어도 이번 만큼은 「일류병」을 버렸으면 하는 게 기자만의 바람은 아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