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산업의 광맥 `SF`](1)상상력을 키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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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14일 오후 7시.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에는 7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부산영화제 폐막작인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서(序)’(감독 안노 히데아키)을 보기 위해서다. 관객 중에는 평소 영화 관람이 뜸한 30대 이상도 다수 눈에 띄었다. 이지민씨(35)는 “10년 전 방영된 에반게리온TV 시리즈에 매료돼 1년 전부터 이 작품을 기다렸다”며 “열 네 살 소년이 조종사가 돼 인류 멸망을 막아낸다는 내용의 전작은 지금도 애니메이션 교과서로 불린다”고 말했다.

 10년 전의 관객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이것이 바로 콘텐츠(이야기)의 힘이다. 뛰어난 이야기는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마니아 층은 ‘팬덤’이라는 전염병을 일반인에게 확산시킨다. 특히 과학적 개연성을 무기로 하는 SF 장르에서 콘텐츠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SF 콘텐츠 시장은 척박하다. SF 소설 출판은 개점 휴업한 지 오래. 영화·애니메이션도 몇몇 작품의 실패 이후 신작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한국 SF 창작물은 전무하다. 창작물의 부재는 팬들의 외면과 시장 위축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SF 창작물, 2%가 부족해=한국의 SF 창작물 역사도 100년이 넘었다. 하지만 역사에 걸맞은 콘텐츠는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다. 특히 한국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SF 창작물이 외면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고민 없는 평이한 스토리 때문이다. 한국 SF 소설은 독창성이 절대 부족하며 과학적 개연성도 약하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최근 본지가 엠브레인과 공동으로 `SF에 대한 인식(N=2000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 SF를 보지 않는 이유’ 중 절반 이상(52%)이 ‘스토리가 재미없어서’라고 답했다. SF영화나 애니메이션도 상황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개봉한 ‘괴물’을 제외하고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예스터데이’ ‘내추럴 시티’ 등 한국산 SF영화는 ‘난데없는 액션신이 난무한다’는 혹평 속에 흥행에서 재미를 못 봤다.

 더 큰 문제는 100억원 이상을 투입한 대작이 실패하게 되면 차기작 제작이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명현 연세대 천문대 연구원은 “SF 창작물은 그럴듯한 과학적 개연성을 바탕으로 치밀한 이야기 전개가 매력이지만 한국 창작물에는 이런 고민의 흔적이 없다”며 “또 과학 자문을 제대로 거치지 않는 작품이 많아 과학 대중화에 역효과를 끼친다”고 지적했다.

 ◇콘텐츠 부재는 산업 활성화 가로막아=콘텐츠 부족은 한국 SF 창작물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심지어 한국 SF산업 발전까지 가로막는다. 먼저 다양하지 못한 토양에서 작품이 양산되다 보니 질적 향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범작 속에 수작이라는 창작 산업의 기본 원칙이 성립되지 않는다.

 미국은 매년 3000여권이 넘는 SF 소설이 발표되지만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SF소설은 10권 이내다. SF작가 박하영씨는 “SF물은 독자가 적다는 이유로 출판에서 소외되고 있다”며 “신춘 문예 등에도 SF장르가 따로 없기 때문에 신예 작가도 나오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콘텐츠 부재는 산업 활성화에도 독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소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다시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등 이른바 원소스멀티유스(OSMU)가 대세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공식이 성립하기 힘들다. 소설·만화 등 참조할 만한 원전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SF영화 제작자들은 편당 5000만원 정도의 판권료를 주고 외국 소설 판권을 사들이고 있는 현실이다. 지난해 제작된 한국 영화의 10%가량이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다. 작품 완성도 측면에서 콘텐츠 부족은 뼈 아프다. 원작이 탄탄하면 다양한 변용이 가능하지만 부실한 소설은 부실한 영화를 낳을 뿐이다.

<탐사기획팀=신혜선기자@전자신문, shinhs@etnews.co.kr 김규태·한정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