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포트] 미국은 똑똑한 통신 소비자의 `선불폰` 천국

미국 최대 전자제품 유통 체인점 베스트바이의 선불폰 진열대. 애플의 아이폰4, 삼성전자의 갤럭시S, HTS의 에보(EVO) 4G 등 최신 스마트폰이 가판대에 나와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선불폰도 이에 뒤지지 않는 대우를 받는다. 휴대폰 섹션 한 쪽에 즐비하게 자리잡은 선불폰들이 눈길을 끈다. 오른쪽부터 부스트모바일, 버진모바일, 버라이존, T모바일, AT&T, 크리켓, 넷10의 선불폰들이 차례로 진열돼 있다.
미국 최대 전자제품 유통 체인점 베스트바이의 선불폰 진열대. 애플의 아이폰4, 삼성전자의 갤럭시S, HTS의 에보(EVO) 4G 등 최신 스마트폰이 가판대에 나와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선불폰도 이에 뒤지지 않는 대우를 받는다. 휴대폰 섹션 한 쪽에 즐비하게 자리잡은 선불폰들이 눈길을 끈다. 오른쪽부터 부스트모바일, 버진모바일, 버라이존, T모바일, AT&T, 크리켓, 넷10의 선불폰들이 차례로 진열돼 있다.

지난 6년간 미국에 체류한 윤영수씨(35). 미국에 오자마자 선불폰(prepaid phone)을 개통했고 지금까지 쓴다. 윤씨는 “정식으로 휴대폰을 개통하려면 절차가 복잡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불폰을 구입했는데 그동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휴대폰을 찾기 어려웠다”며 “2년 약정으로 매월 정해진 통신료를 내야 하는 일반 휴대폰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서비스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통신료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미국이지만 미리 요금을 충전(선불)해 통화·문자전송 등에 쓴 만큼 돈이 나가는 것 말고는 따로 유지비가 들지 않아 큰 부담이 없다. 윤씨는 “예전에는 유학생이나 잠시 미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주로 이용했지만 요즘에는 미국인도 선불폰을 쓰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쑥쑥 크는 선불폰 시장=미국 이동통신 시장에서 선불폰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후불제 휴대폰에 비해 개통과 사용의 편리함,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 이통 시장의 틈새를 파고들면서다.

선불폰은 구입 및 개통 절차가 매우 간단하다. 베스트바이, 타깃, 라디오섁 등 전자제품 전문 유통점은 물론이고 월마트, 코스트코, CVS 같은 할인 유통점에만 가도 선불폰이 널렸다. 기기의 가격과 요금제, 사업자를 비교해 마음에 드는 휴대폰을 고르면 그만이다.

구매한 선불폰은 대리점을 방문할 필요 없이 전화나, 인터넷으로 즉시 개통할 수 있다. 통신사업자가 신용조회 등에 필요하다며 요구하는 서류를 작성해서 보내거나 개통까지 하루가량을 기다려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없다.

나는 전자제품 유통점인 베스트바이에서 가장 저렴한 선불폰을 골랐다. `넷10`이라는 가상이동통신망사업자(MVNO)의 선불폰으로 기기 값 30달러에 첫 60일간 300분 무료 통화가 포함됐다. 일요일 저녁 베스트바이에서 구입한 휴대폰을 그날 밤 인터넷으로 개통했다.

휴대폰 약정 가입이 `노예계약` 같아 싫다는 이들도 선불폰을 찾는다. 이들은 필요한 만큼 통화하고, 쓴 만큼만 내는(pay-as-you-go) 선불폰이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요금제가 매우 다양해 자신의 통화 스타일에 맞는 가입 조건을 선택할 수 있다. 다른 이통사에서 개통한 번호를 선불폰으로 옮겨쓰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숫자가 말해주는 선불폰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지난해 4분기 미국 이동통신 가입자 2억8500만명 중 선불폰 가입자가 5440만명에 달했다. 5명 중 한 명 꼴로 선불폰을 이용하는 셈이다.

가입자 증가세도 무섭다. 지난해 4분기 선불폰 가입자는 5440만명으로 1년 전보다 17%나 급증했다. 1년 만에 1000만명 가까이 늘어났다. 같은 기간 통신사에 약정 형태로 후불제 상품에 가입한 이들이 3% 증가한 것과 대조된다. 지난해 4분기에는 선불제 신규 가입자가 처음으로 후불제 약정 가입자 수를 넘어섰다. 이통서비스 신규 가입자 420만명 가운데 3분의 2가 선불폰 가입자였다.

◇입맛대로 골라 쓴다=수요가 일자 이통사는 다양한 요금제를 내놓았다. 버라이즌, AT&T, 메트로PCS, 트랙폰, 부스트모바일, 크리켓, 넷10, 카짓 등 선불폰 사업자 수만 해도 10개가 넘고, 회사마다 최소 세 가지 이상 요금제를 제공한다.

요금체계도 매우 세분화했다. 대개 시장 점유율이 높은 사업자일수록 분당 요금이 비싸고 하위 사업자로 갈수록 가격이 쌌다. 버라이즌의 기본 선불 요금은 음성 1분당 25센트, 문자메시지는 건당 20센트다. 넷10은 음성이 분당 10센트, 문자메시지는 휴대폰 기종에 따라 2.5~5센트를 받는다.

월정액 요금제도 있다. 매달 일정 금액을 내면 통화, 문자메시지, 데이터 사용량이 주어진다. 통신사별로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기간 약정 없이 사용하는 게 장점이다. 대개 통화 시간이 길수록 일반 휴대폰의 요금제보다 저렴해진다. 하루에 1~4달러를 내면 마음껏 전화를 걸 수 있는 1일 무제한 요금제도 있다. 1일 무제한 요금제는 전화를 쓰는 날만 요금을 받는다.

깊어진 불황으로 소비자가 저렴한 선불폰에 몰리자 초저가 무제한 요금제도 등장했다. 중소 통신사들이 경쟁적으로 월 40달러 안팎에 사실상 무제한 통화, 문자메시지, 데이터 통신이 가능한 선불폰을 판다.

시장이 무르익으면서 `선불폰은 폴더나 바 타입의 구식 싸구려 휴대폰`이라는 편견도 사라졌다. 올 2분기에는 처음으로 스마트폰이 선불폰으로 등장했다. 메트로PCS는 지난 5월부터 블랙베리의 인기 스마트폰 `커브`와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코드`를 선불폰 라인업에 올렸다. 기종에 따라 50~60달러를 내면 무제한으로 음성, 문자, 데이터 등 모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T모바일, 버진모바일 등도 비슷한 요금 수준으로 무제한 스마트폰 선불폰을 출시했다. 블랙베리, 안드로이드폰 등 쟁쟁한 스마트폰들이 봇물 터지듯 선불폰 시장으로 침투하면서 사업자들은 소비자의 다양한 수요에 맞출 수 있게 됐다.

알 모슈너 립와이어리스 최고운영책임자(COO)는 “그간 스마트폰을 선불폰으로 확보하지 못해 주요 이통사와의 경쟁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해소하게 됐다”고 말했다. `크리켓`이라는 브랜드로 선불폰 사업을 하고 있는 립와이어리스는 올해 2종 이상의 스마트폰을 선불폰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유통점까지 가세=똑똑한 소비자들이 선불폰에 몰리면서 관련 시장은 미 이동통신시장의 격전지가 됐다. 이통사는 물론이고 월마트, 베스트바이 등 유통업계가 선불폰 시장에 군침을 흘리는 게 흥미롭다. 거대 유통점들은 그동안 휴대폰의 판매 채널로 수수료를 챙기는 것에 만족했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직접 이통사의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다. 주요 이통사의 망을 빌려 MVNO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국 수천개의 상점에 휴대폰 판매 섹션을 갖췄다. 이통사의 망을 빌려 초기 투자비용은 크지 않지만 상당히 파괴력 있는 사업자가 될 전망이다.

실제로 미국 최대 소매 유통점인 월마트는 지난해 10월 선불폰 시장에 진출해 파란을 일으켰다. 선불폰 사업자인 트랙폰과 손잡고 `스트레이트 톡`이라는 선불폰 서비스를 내놨다. 미국 1위 이통사 버라이즌의 망을 빌린 이 서비스는 월 30달러를 내면 통화 1000분, 문자 1000건, 데이터 30MB를 이용할 수 있다. 45달러짜리 요금제는 모든 서비스가 무제한이다. 기존 통신사와 비교하면 가히 파격적이라 할 만한 요금제다.

미 언론들은 월마트가 이 사업에 재미를 보면서 조만간 AT&T도 월마트에 망을 임대해 줄 것이란 소식을 전했다. 미 최대 전자제품 유통점 베스트바이도 선불폰 사업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베스트바이의 휴대폰 판매법인인 베스트바이모바일은 사업 확장을 위해 프리미엄 선불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숀 스코어 베스트바이모바일 최고경영자(CEO)는 “2년 전만 해도 선불폰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매우 중요한 시장이 됐다”며 “프리미엄 선불폰을 늘리고 더욱 다양해진 요금제를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선불폰, 비주류에서 주류로=몇 년 전만 해도 선불폰의 주요 고객은 후불 휴대폰의 까다로운 가입 절차에 맞추기 어렵거나 통신료에 민감한 소비자에 국한됐다. 하지만 선불폰이 후불 휴대폰에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고 저변을 넓히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호세 구즈만 NMRC 연구원은 “불황이 계속되면서 미 이동통신 시장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고 진단했다. 선불폰의 비약적인 성장이 후불 휴대폰을 기반으로 사업을 키워 온 공룡 통신사에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버라이즌, AT&T 등 주요 통신사가 선불폰 대비 비싼 요금을 내고 약정 서비스에 가입하는 소비자를 달래기 위해 더 좋은 서비스를 제시하거나, 통신요금을 인하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구즈만 연구원은 “월 요금 30~45달러 수준의 무제한 선불폰이 경쟁적으로 등장하면서 최근에는 다른 움직임이 감지된다”며 “불황이 끝나도 30~45달러 수준의 무제한 선불폰은 소비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에서 선불폰은 여전히 낯설다. 통신 소비자의 인지도가 낮거니와 KT, SK텔레콤 등 주요 사업자의 선불폰 정책도 매우 소극적이다. 한국도 고가의 휴대폰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대신 정해진 통신료를 내고 약정 가입을 하는 방식이 일반화하면서 이동통신 요금 인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는다. MVNO 사업자 선정 등 각종 난관이 버티고 있지만 때마침 할인 유통점들이 이동통신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선불폰 확산이 이 같은 움직임의 대안이 될 것이란 기대도 품어봄 직하다.
메릴랜드(미국)=차윤주 자유기고가 cha.yunj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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