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과 오전 9시는 늘 분주하다. 지하 부검실에서는 매일같이 경찰과 검찰, 의대생이나 견학생들이 오가며 부검을 참관하고, 법의관들은 메스를 들고 부검대에 누워있는 시신과 대화를 시작한다.

최근 법의관들의 세계를 다룬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부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일반인에게 법의학은 낯선 지점에 있다. 유족들은 돌아가신 분에 `칼을 대는` 행위인 부검을 탐탁지 않아 하고 국과수 법의관 수는 아직도 부족하다. 불합리성을 간직한 현행 검시제도, 인력 부족, 법의관 양성의 제도적 개선 등 안타깝지만 대중의 관심에 비해 아직도 한국 법의학은 가야할 길이 멀다.
법의관의 길로 들어선지 아직 1년을 못 채운 지금, 법의학 최전선을 담당하는 국과수 법의관으로서 나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낀다. 때로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사인을 알기 어려울 때가 있고, 밝혀낸 사인일지라도 그 해석에 있어 고민을 해야 할 때가 많다. 수많은 사실의 조각들을 맞춰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울 수밖에 없다. 법의관이라는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처음 부검을 집도하던 때와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덮쳐오는 것은 책임감이라는 단어다. 내가 내리는 판단에 따라 누군가 누명을 벗고, 누군가는 벌을 받으며,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안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의 커다란 무게는 때로는 나를 짓누르지만, 내 일을 더 사랑하고 몰두할 수 있게도 한다. 그래서 한 건의 감정서를 쓰기 위해 몇 달간 고민하고, 자문을 구하고, 타인의 삶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잠을 설치기도 한다.
가끔은 내가 이 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 직업이 나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현재 원하는 일을 하고 있든 혹은 그렇지 않든 간에 개인적으로 직업은 그 사람에게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현재 가고 있는 길이 최선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도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처음부터 법의관이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한 것이 아니었고,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내가 이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되돌아보면 내가 법의관이 되기 전까지 거쳤던 많은 과정들은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필연적인 일들이었고 또 행운이었다.
나는 좀 더 많은 삶의 단면들을 보고, 그 안에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의 일을 선택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답하는 과정과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면 꿈은 좀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내가 오늘도 나의 직업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 속에서 자아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정하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 hariny01@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