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7>이태규 박사, 과학기술부 설치 제안...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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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왼쪽)이 1964년 9월 25일 청와대에서 이태규 박사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1964년 9월 25일 청와대에서 이태규 박사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이태규 박사는 한국 과학계의 거목(巨木)이다. 광복 후 과학기술부 설치를 정부에 처음 제안했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후보에 올랐으며, 한국 화학박사 1호다. 국내 과학자 가운데 맨 처음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처음이란 수식어가 많이 붙는 과학자다.

이 박사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됐다. 현충원 정문을 지나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경찰충혼탑이 보이고, 바로 국가유공자 제2묘역이 나타난다. 묘역 올라가는 계단 옆 안내판에 새겨진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라는 글귀가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제2묘역에는 최두선 전 총리,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이범석 전 총리, 홍종철 전 문교부 장관, 김홍일 전 외무부 장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등 각계 인사 14분을 모셨다. 묘역 주변은 소나무가 둘러싸고, 중간중간에 목백일홍이 심어져 있다. 숲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위혼곡(慰魂曲)을 부르고 있었다. 각 묘소에는 붉은 장미가 놓였고, 그 옆에 꽂아 놓은 손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과학입국을 빛낸 이 박사의 묘역은 12번이다. 묘비에는 이 박사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에게 부여된 생을 영위한다. '어떻게' 보내는 것이 참 가치 있는 일일까 연구하며,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리하여 내가 얻어낸 결론은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심성의껏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과학자다. 그래서 나는 예리한 관찰과 꾸준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게 되었으며, 이 구절을 마음 깊이 새기고 이 길로 걸어 왔다. 그리고 결코 후회하거나 바꿀 의도는 없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걸어가겠다.” 외길 과학자의 삶을 산 결연한 과학 열정을 읽을 수 있다. 현충원 유품전시관에는 이 박사의 유품인 노트, 논문,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이 박사가 과학기술부 설치를 제안한 것은 미 군정기인 1946년 2월이다. 미 군정은 한국 교육문제 자문기구로 1945년 11월 14일 조선교육심의회를 발족했다. 이 박사는 조선교육심의회에 두 가지 정책안을 제안했다. 하나는 과학교육진흥책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행정을 총괄하는 과학기술부 설치안이다. 1946년 2월 7일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제12회 전체회의에서 과학교육진흥책(안)을 제안했다. 고등교육기관 설립은 문과(文科) 계통을 억제하고 이과(理科) 계통을 확충하며 문과와 이과 졸업 비율을 3대 7로 조정하자는 내용이었다. 심의회 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이 제안을 통과시켰다. 그해 2월 14일 열린 회의에서 국내 처음으로 과학기술부 설치안을 제안했다.

이 박사는 토목공학의 이희준씨(전 학술원 종신회원), 수산학의 정문기씨(초대 수산대학장), 농학의 조백현씨(전 서울대 농대학장), 기계공학의 김로수씨, 응용화학의 안동혁씨(전 상공부 장관) 등 여덟 명 및 위원장인 윤일선 박사(전 서울대 총장)와 함께 이 안건을 심의했다. 이 박사가 제안한 과학기술부 설치안은 과학행정 조직, 과학기술 정책 자문기구인 과학심의회, 종합기술연구소 등 크게 세 줄기로 구성됐다. 과학행정 조직으로는 기술행정국, 특허국, 과학진흥국, 제1연구국, 제2연구국 등 5개 국을 둘 것을 제안했다.

과학진흥국은 기술자 양성과 기술자 배치, 과학박물관·과학도서관 등의 업무를 담당하기로 했다. 제1연구국은 전기시험소, 교통공학시험소, 기계시험소, 기상대 등 14개 시험소를 맡기로 했다. 제2연구국은 농업시험소, 축산시험소, 임업시험소, 예방의학시험소, 약학시험소 등 12개 시험소를 담당한다. 과학심의회는 국내 저명한 인사로 자문기구를 구성해 과학기술 행정과 산업 발전 현안에 대한 심의 및 제안을 맡게 했다. 국내 종합기술연구소는 공학연구부, 수학연구부, 화학연구부, 물리학연구부 등 10개 연구부를 총괄하는 등 새로운 종합 연구기관 설립을 전제로 한 제안이었다.

이 박사가 제안한 과학기술부 설립안은 안타깝게 결실을 보지 못했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미 군정이 그해 3월 7일 조선교육심의회를 페지함에 따라 더 이상 논의하지 못했다. 그 후 정부는 1948년 문교부에 과학기술국을 설치했고, 1963년 경제기획원에 기술관리국을 신설했다. 이 박사는 1946년 5월 창간한 월간 '현대과학' 5월호에 '건국(建國)설계의 하나로 과학기술부를 설치하자'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과학기술부를 설치해야 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과학기술 수준이 낮으면 국민이 문명인 생활을 할 수 없고, 다른 하나는 과학이 발전하지 못하면 국가안보와 경제적인 면에서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기 쉽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조선과학교육을 진흥하는 제1 방안은 정부가 독립 부처인 과학기술부를 설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기술부를 신설하면 각 부서로 분산돼 있는 기술행정 체계를 일원화해 과학기술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과학기술부 장관, 종합연구소장, 관계 부처 관계자, 산업계 대표 등으로 구성한 과학심의회를 설치해 국가의 산업 발전 현안을 심의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미국 록펠러연구소나 독일의 카이저-빌헬름연구소 같은 종합연구소를 한국이 설립해서 국가 산업 발전을 이끌고, 이를 통해 유능한 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같은 제안에 대해 “과학기술부 설치안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과학기술 거버넌스 설계도”라고 평가했다.

이 박사는 1902년 1월 26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은 '영재'로 소문났다. 이 박사는 월반(越班)을 거듭해 4년 만에 예산보통학교를 수석 졸업했고, 도지사 추천으로 당시 최고 명문이던 경성보고(현 경기고)에 입학했다. 1924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27년 일본 교토제국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교토제국대 대학원에서 촉매화학 분야를 연구해 한국인 최초로 화학 분야 이학박사 학위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였다. 당시 국내 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이후 교토제국대에서 조교수, 교수를 역임했다. 1937년 조교수 임용 당시 일본인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그때 이 박사의 지도교수인 호리바 신키치 박사가 나서서 “이태규 박사는 우리 화학과에서 최고 인재다. 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느냐”고 주장, 조교수로 임용했다고 한다.

1939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헨리 아이링 박사 등 세계적인 석학과 함께 연구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해 서울대 이공학부장, 1946년 서울대 초대 문리과대학장을 지냈다. 이 박사는 1946년 7월 조선화학회(현 대한화학회)를 설립, 초대 회장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화학 분야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좌우익 투쟁에 환멸을 느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 유타대 교수 등을 재직했다. 교수 재직 중 아이링 박사와 함께 발표한 '비(非)뉴턴 흐름에 관한 연구'는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불리며 세계 과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박사의 유타대 제자로는 이용태 퇴계학연구원 이사장, 한상준 전 한양대 총장, 권숙일 전 과학기술처 장관, 김각중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장세헌 전 서울대 교수, 천병두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전주식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있다. 이 박사는 1964년 9월 25일 오전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했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과학기술 발전은 경제 발전에 필수”라면서 “과학기술자를 잘 기르려면 이 박사 같은 분이 뒷받침해야 한다”며 에둘러 귀국을 권했다.

이 박사는 “조국이 필요하다면 어떤 일도 하겠다”면서 “한국의 내일은 밝다. 한국 유학생들의 탐구욕에 머리가 수그려졌다”고 대답했다. 박 대통령은 이 박사의 말에 힘을 얻어 해외 과학자 유치에 적극 나섰고, 최형섭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이 박사를 모셔 오도록 지시했다.

이 박사는 그로부터 9년 뒤 유타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1973년 영구 귀국해 1992년 작고할 때까지 한국과학원(현 KAIST)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 박사는 자신에게 엄격한 완벽주의자로서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연구를 계속했다. 이 박사는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 1955년 노벨상 수상자 후보, 1965년 노벨상 수상자 후보 추천위원을 역임했다. 1966년에는 KIST 고문직을 맡았다. 90 평생 중 50여년을 일본과 미국에 살았다. 그러나 일본의 창씨개명 거부, 미국시민권 포기 등 나라 사랑을 실천한 과학자였다.

이 박사가 1992년 10월 26일 작고하자 노태우 정부는 10월 30일 국무회의를 열고 국내 과학자 가운데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키로 의결했다. 이 박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유공자'로 뽑혀 '명예의전당'에도 헌정됐다. 이 박사는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 지도를 제시한 과학계 거목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