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49>한국과학원 1978년 첫 박사 2명 배출

1975년 8월 20일 열린 한국과학원 제1회 석사학위 수여식 모습. <KAIST 제공>
1975년 8월 20일 열린 한국과학원 제1회 석사학위 수여식 모습. <KAIST 제공>

1975년 8월 20일. 한국과학원(현 KAIST)은 이날 오전 11시 과학원 대강당에서 제1회 석사학위 수여식을 거행했다. 1973년 3월 5일 첫 입학식을 치른 후 2년 6개월여 만에 첫 이공학 석사 배출이었다. 학위 수여식에는 조순탁 과학원 원장을 비롯한 교수들과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 과학기술계 인사, 학부모 등이 참석했다. 이날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모두 92명. 공학석사 67명, 이학석사 25명이었다. 이 가운데 79명은 정부기관, 교육기관, 연구기관, 일반 기업체 등으로 진출해 둥지를 틀었다. 연구기관이 42명으로 가장 많았다. 뒤를 이어 교육기관 22명, 기업체 15명 순이었다. 이들은 각 분야에서 과학기술 두뇌 역할을 했다.

산업체에서 과학원 졸업생의 인기는 대단했다. 졸업도 하기 전에 기업체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이 잇따랐다.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회고. “기초가 탄탄했던 전기·전자공학과 학생들은 산업계에서 경쟁적으로 취업을 제안받았다. 이들은 한국 전자산업은 물론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발전을 이끌어 갔다. 산업 발전은 마라톤과 같아 빨리 가는 것보다 멀리 가는 게 더 중요하다. 마라톤은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산업도 마찬가지다.”(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정부는 과학원 석사학위자를 사무관급으로 파격 대우했다. 기업체도 과학원 교육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해서 인사에 반영했다. 졸업생 가운데 9명은 같은 해 9월 12일 개설한 과학원 박사학위 과정에 진학했다. 첫 박사과정 입학생은 기계, 화공, 물리 등 6개 분야 35명이었다. 박사학위 과정은 세계 수준의 이공계 대학원 구현이라는 설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개설해야 할 일이었다. 과학원은 박사학위 과정 개설을 통해 교육과 연구 분야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향상하고자 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박사과정에 대한 정부의 예산 지원이 없어 재정난에 시달렸다. 과학원은 한시적으로 산학제 학생을 위해 산업계가 지원하는 학비, 연구비, 교수 인건비 등으로 재원을 마련했다. 정부가 예산을 지원한 것은 박사학위 과정을 개설한 1년 후인 1976년 9월부터였다.

과학원은 1년 후인 1976년 3월 제2회 석사학위 졸업생 145명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54명은 연구기관, 39명은 기업체, 30명은 교육기관에 취업했다. 주목할 점은 1회 졸업생 가운데 기업체로 취업한 인력이 15명이었으나 2회 졸업생은 39명으로 급증했다. 전자·전기공학과 졸업생의 경우 24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13명이 산업체로 진출했다.

과학원 당시 고위 관계자의 말. “당시 과학원 졸업생을 데려가려는 기업체의 수요는 해마다 늘었어요. 정부가 추진한 경제개발정책이 성공하면서 제철, 조선, 전자 등 각 산업이 급격히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고급 기술 인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이는 곧 졸업생 유치 경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과학원은 1977년 봄학기부터 전문 석사 과정을 새로 개설했다. 생명공학과 화학공정공학 등 2개 과정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산업전자공학 과정을 추가했다. 과학원은 1979년부터 전문 석사 과정 졸업생을 배출했다. 과학원은 1978년 3월 21일 수학·물리학과를 수학·물리학과와 전산학과, 화학·화학공학과를 화학과와 화학공학과로 각각 분리해서 독립 학과로 개편했다. 1979년 3월에는 정부의 항공기공업 육성정책에 발맞춰 항공공학과를 신설했다.

과학원은 1980년 기계공학과, 산업공학과, 생명공학과, 수학·물리학과, 재료공학과, 전기·전자공학과, 전산학과, 항공공학과, 화학과, 화학공학과 등 10개 학과와 산업전자공학·생산공학·화학공정공학 등 3개 전문석사 과정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학생 수도 949명인 대규모 이공계 대학원으로 발전했다.

1978년 8월 19일. 한국과학원은 제1회 박사학위 수여식을 갖고 처음 2명의 공학박사를 배출했다. 이날 학위를 받은 박사 1호는 기계공학과 양동렬 박사, 2호는 양창주 박사였다. 양창주 박사는 산학제로 당시 현역 군인이었다. 양동렬 박사는 과학원 교수로 남았고 양창주 박사는 국방과학연구소(ADD)로 갔다. 과학원은 이듬해인 1979년 2월 20일 8명, 1980년 2월 20일 6명과 8월 28일 7명 등 3차에 결쳐 모두 23명의 박사에게 학위를 수여했다.

한국 최고의 이공계 대학원으로 자리매김한 한국과학원은 1980년 들어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통합·분리 과정을 거쳐 199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거듭났다. 이에 따라 KAIST는 홍릉 시대를 마감하고 대덕 시대를 열었다.(이 과정은 추후 다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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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양동렬 KAIST 1호 박사

양동렬 박사는 한국과학원(현 KAIST) 석사 과정 1회 입학생이자 1호 박사다. 박사학위를 받고 곧장 과학원 기계공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KAIST 연구담당 부총장을 지냈고, 38년 동안 후학을 지도했다. 이후 광주과학원 석좌교수로 5년 동안 강의, 모두 43년간 강단에 섰다. 국내 처음 3D프린팅을 연구한 개척자로서 2015년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받았다. 현재 KAIST 명예교수이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이다. 지난해 '3D프린터의 이해와 전망'이라는 저서를 냈다. 다음은 양 박사와 나눈 전화 인터뷰 내용이다.

-과학원에 입학한 계기는.

“서울대 공대 기계과 3학년 때였다. 어느 날 과학기술처 국장이 와서 과학원 소개를 했다. 당시 집안이 가난해 아르바이트와 과외 교사를 했다. 과학원이 기숙사 제공에다 군병역특례, 매월 장학금까지 준다니 '이거 나를 위한 학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원했다.”

-과학원 생활은 어땠나.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내게는 천국이었다.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숙제를 엄청 많이 내줬지만 '공부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기계공학과는 학과장인 이정오 박사(전 과학기술처 장관)와 배순훈 교수(전 정보통신부 장관), 이중홍 교수(전 경방회장)가 강의했다. 이중홍 교수는 경방의 막내 사위로, 나중에 학교를 떠났다. 그 시절 숙제하느라 밤낮이 없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실험을 많이 했다. 교수 아파트와는 걸어 5분 거리여서 밤늦게 교수들이 실험실에 자주 들렀다. 이정오 교수는 교재 없이 빈손으로 들어와서 강의, 학생들의 기를 팍 죽였다. 배순훈 교수나 이중홍 교수도 강의를 잘해 인기가 많았다.”

-1호 박사인데.

“1978년 8월 2명이 처음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와 양창주 박사다. 이름 초성이 어순으로 내가 앞서서 1호 박사가 됐다. 당시 조순탁 원장실에서 수여식을 했다. 참석자는 부원장, 학과장 등 5명이었다. 박사학위증 원본은 과학원에서 보관하고 나는 사본만 갖고 있다. 박사학위를 받고 열흘 만에 조교수로 부임했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석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소로 가기로 했는데 변수가 생겨서 가지 못하고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국방과학연구소(ADD)로 가기로 내정된 상태였는데 이 또한 사정이 생겨서 못 갔다. 이후 독일 슈투트가르트대학교 공대로 포닥(포스트닥터)을 갔다.”

-국내 처음으로 3D프린팅 연구를 했는데.

“단어조차 생소하던 1990년에 국내 최초로 3D프린팅 연구를 시작했다. 이를 응용해 쾌속 조형 3D프린팅 기술을 개발했다.”

-생활 3원칙이 있다는데.

“교수 시절에 나름대로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과학원에서 15분 거리 밖으로 나가지 않고 △토요일은 일하는 날로 정해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한다 △하루에 3시간씩 저녁 시간을 이용해 전문 분야 학습한다 등을 3대 원칙으로 정했다. 이런 원칙을 고수하다 보니 아내한테 원망을 많이 들었다. 교수 아파트를 나와서 서울 강남으로 이사 간 교수들은 아파트 가격이 올라 큰돈을 벌었다. 나는 원칙을 지킨답시고 과학원 인근에 살았다. 아내한테 할 말이 없다.”

-엔지니어를 위한 3S는 무엇인가.

“과학자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우선 자기 신뢰(Self confidence)다. 다음은 자기 추진력(Self Driving Force)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일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이 섬기는 마음, 즉 봉사 정신(Self Serving Mind)이다. 이를 학생들에게 늘 강조한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