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망경]기술 선진국의 조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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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고 씨앗을 알 순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씨앗을 보고 어떤 나무로 클지 짐작할 수 없다. 최초의 질문과 그에 대한 첫 번째 답은 씨앗이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최근 출판한 '최초의 질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기술 혁신 전문가인 그는 기술 선진국을 악착같이 따라가는 방식으로 성장한 우리나라가 이제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 설원 '화이트 스페이스'에서 길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무도 하지 않은 '최초의 질문'을 던지면서 모방이 아니라 창조를 위한 기술의 '씨앗'을 찾으며, 명실상부한 기술 선진국으로 등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의 저서는 현재 우리 정부가 제시해야 할 정책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추격형 연구개발(R&D)로 많은 산업에서 선도자 지위를 구축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정부 R&D로 산업 생태계를 지원했고, 특히 기술력을 갖춘 중소·중견기업을 도우면서 우리나라 산업 성장에 기여했다.

선도자 지위에 들어선 우리나라는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정부 R&D도 대폭 바뀌어야 한다. 디지털전환과 탄소중립으로 세계적인 대전환 시대에 앞서 의제를 선점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 '추격형' R&D 과제가 아니라 '선도형' R&D 과제로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한다. 이 과제를 출범 1개월이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수행해야 한다.

다행히 정부 부처에서는 선도형 R&D를 구축하기 위해 밑그림을 그렸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윤석열 정부에서 목표지향·선도형 산업기술 '메가 임팩트(Mega Impact)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표지향형의 대규모 프로젝트와 미래 산업 판도를 바꿀 파괴적 혁신 기술 개발 사업 지원이 목표다. 이를 위해 기술 개발부터 기반 구축, 표준화, 사업화 등을 아우르는 '턴키' 방식 정책을 수행할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문제는 현행 정부의 R&D 지원제도가 20년 넘게 변화하지 않은 낡은 제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현행 정부 R&D는 국비 기준 300억원, 총 사업비 기준 500억원 이상인 사업에 한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한다. 예타 제도가 신설된 1999년에 만든 제도임에도 23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해묵은 예타 제도부터 개편해야 한다. 예타 기준금액을 대폭 상향하는 것과 함께 국가첨단전략기술에 한해 예타를 면제하는 등 제도를 유연하게 개편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정부가 결단해야 할 때다.

변상근기자 sgb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