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을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기원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건립된 최초의 도서관부터 지식은 늘 권력의 무기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항구에 들어오는 모든 배의 책을 압수해 필사본을 남겼다. 지식패권 전쟁이다. 지식을 누가 수집하고 분류하고 보존할 것인가. 중세 유럽에서 지식패권은 교회로 넘어갔다. 지식은 신학적 질서 속에서 재해석돼야 했고, 수도원은 성스러운 필경사의 손을 통해 지식에 질서를 부여하고 통제하는 보관장소가 됐다. 중세는 지식을 억압했지만 한편 잘 보존하고 후대로 전달했다.
르네상스 시대 과학혁명은 지식 폭증과 인쇄술 발명으로 지식 대량복제를 촉발하며 수도원에 갇혔던 지식을 해방시켰다. '권력'에서 '기술'로 지식패권이 이동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프랑스 백과사전(Encyclopedie, 1751~1772년)은 무려 160명의 저자가 7만1818항목을 집대성했다. 이 근대 백과사전의 원형은 지식 집대성을 넘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준 '혁명적 사상서'였다. 지식 민주화다. 19세기 지식 체계화를 향한 근대적 욕망의 압축판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집집마다 들여놓아야 행세할 수 있었던 식자층의 고가 필수품이 됐다.
1993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의 CD-ROM 번들로 출시한 엔카르타는 멀티미디어, 낮은 가격, PC 대중화를 무기로 난공불락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무너뜨렸다. 종이책은 비용이 너무 크고 갱신도 검색도 힘들었다. 잠시 뿐, 성공의 축배를 들기도 전에 인터넷과 함께 탄생한 위키피디아의 공세에 엔카르타는 장렬히 전사했다(2009년). 웹 2.0 개방형 집단지성의 승리였다.
인터넷의 제왕 구글은 고민에 빠졌다. 야후, 알타비스타 등 굴지의 검색엔진을 꺾고 황제가 된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은 PageRank다. 검색어가 '사과'라면, 기존 검색엔진들은 문서의 제목 등 중요 위치에 '사과'가 나오거나 다빈도 출현 문서에 높은 점수를 매겼다면, '사과'가 등장하는 문서들을 찾은 후 '사과'의 '링크'가 향하는 참조문서에 점수를 매겼다. 그래프 기반 PageRank는 사용자가 '사과'를 클릭했을 때 열릴 확률이 가장 높은, 즉 사용자에게 가장 의미있는 허브 문서를 바로 찾아줘 검색 패권을 차지했다.
문제는 위키피디아였다. 주요 검색어 거의 모두에서 위키피디아 문서가 1순위 검색결과를 독점(2005~2008년)했고 구글 생태계 절대권력이 됐다. 신뢰도가 가장 높은 문서가 백과사전 정보임은 당연했다. '검색'은 구글이 재패했지만, '검색결과'와 '의미'는 위키피디아가 지배했다. 다급해진 구글은 “개방형 위키피디아는 아무나 편집하므로 신뢰할 수 없다”라며 전문가의 실명 저작 지식인 놀(Knol)을 만들며 위키피디아에 도전했다. 대참패였다(2012년). 폐쇄적 놀은 집단지성의 개방성을 이길 수 없었다.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최근 구글 검색결과 최상단에 제공되기 시작한 '인공지능 오버뷰(AI Overview)'는 드디어 검색 1순위에서 위키피디아를 밀어냈다. 하지만 거대언어모델(LLM)은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지 못한다. 통계적 패턴 생성일 뿐 사실검증이나 출처관리 능력이 없다. LLM은 여전히 위키피디아에 의존한다. 위키피디아가 사라지면 LLM의 신뢰도는 급속히 붕괴한다. 위키피디아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한편 놀 개발 당시 발전시켰던 '지식그래프'가 구글 비장의 무기로 돌아왔다. 1980년대 존 F. 소와(John F. Sowa)는 모든 지식을 '개념'과 '관계'의 그래프로 표현할 수 있다는 담대한 주장을 펼쳤고, 그 '개념그래프'의 지적 계보는 '시맨틱 웹의 RDF/OWL 온톨로지'와 '지식그래프'로 이어진다. 단순 '문자열'만 처리하는 LLM이 이해 못하는 '세계 구조'를 지식그래프가 '의미 모델'로 제공하고, LLM의 생성 능력과 결합해 '사실 정합성' '검색 속도' '문맥 이해'를 대폭 강화했다.
끝이 아니다. 팔란티어 온톨로지는 현실세계의 엔티티, 사건, 관계, 규칙을 변하는 실세계 데이터와 연동한 실시간 모델링으로 지식그래프를 단순 정보저장 구조를 넘어 '의사결정과 실행 엔진'으로 격상시켰다. 온톨로지는 실세계 모델을 LLM과 결합해 사실의 이해와 사실 기반의 행동 결정까지 추구한다. 위키피디아는 이제 '지식표현' 기술에 의해 살해당할 위협과 마주했다. 브리태니커가 디지털 기술에 죽었고, 놀이 공동체에 죽었다면, 위키피디아의 죽음은 지식표현 기술의 진화로 초래될지 모른다. 지식패권을 향한 인류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juha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