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의 패러다임 디자인]〈24〉프라자 합의 이후 40년, 반도체 전쟁의 승부수

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
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

반도체 전쟁은 관세로 끝나지 않는다. 승부는 언제나 기술에서 갈린다.

최근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미국-대만 무역 합의' 소식은 단순한 통상 뉴스가 아니다. 미국이 대만에 관세 면제와 세제 혜택을 제공하며 반도체 협력을 제도화하는 장면은,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에 던져진 분명한 경고다. 거대한 지정학의 파고 앞에서 한국의 선택지는 명확하다. 협상을 잘하든지, 아니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기술적 급소를 쥐는 것이다.

이 답은 이미 40년 전 역사 속에 있다. 1985년 뉴욕 프라자 호텔에서 체결된 '프라자 합의'는 세계 반도체 지형을 바꿨다. 당시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일본 반도체는 미국의 압박 속에서 급속히 힘을 잃었다. 그 거대한 공백을 파고든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승부사 기질'로 무장했다. 일본이 보복 관세와 엔고의 늪에서 주춤할 때, 우리는 전 재산을 건 공격적 투자로 3개월 만에 생산라인을 구축했다. 삼성의 이병철, 이건희 회장의 결단이 결정적이었다. 공정을 혁신해서 원가 경쟁력을 확보했다. 지정학적 기회를 기술적 속도로 전환한 결단이었다. 이 선택이 메모리 강국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됐다.

반면 대만은 다른 길을 택했다. 환율에 의존하던 조립·가공 산업 모델의 한계를 인정하고, 국가 생존 전략으로 반도체를 선택했다. 대만 정부는 미국 반도체 산업 전 과정을 경험한 모리스 창에게 전권을 맡겨 1987년 TSMC를 설립했다. 설립 당시 정부·연구기관과 민간이 지분을 나누는 구조로, 단일 대주주가 없는 중립성이 회사의 정체성이 됐다.

TSMC는 설계와 자체 제품을 포기하고 오직 파운드리만 수행하는 모델을 선택했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 원칙, 지식재산 보호를 핵심 가치로 삼았다. 여기에 국가 차원의 전력·용수·인력·토지 지원이 결합되며 TSMC는 환율 경쟁이 아니라 미세공정과 수율, 신뢰라는 기술 곡선 위에서 성장했다. 결국 TSMC는 프라자 합의 이후 대만이 선택한 산업 구조 전환 전략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삼성의 '속도 전략'과 대만의 '국가 전략·신뢰 전략'은 반도체 강국으로 가는 두 갈래 길이었다.

이제 전장은 다시 이동하고 있다. 경쟁의 중심은 미세공정을 넘어 첨단 패키징으로 옮겨 갔다. 회로 선폭을 줄이는 미세공정이 물리적 한계에 다다르면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칩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쌓고 연결하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핵심이 됐다. 대만이 NVIDIA의 핵심 파트너로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비결도 'CoWoS'라는 독보적인 패키징 기술에 있다.

패키징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첫째,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의 초격차를 만들어야 한다. 차세대 HBM4에서 이 기술을 선점한다면, 글로벌 빅테크들은 “한국의 패키징 없이는 고성능 AI 가속기를 완성할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둘째, 패키징 생태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패키징은 단순한 후공정이 아니라 설계와 제조가 결합되는 시스템 통합의 영역이다. 국내 소부장 기업들과의 연대를 통해 패키징용 신소재와 검사 장비를 국산화하고, 이를 하나의 거대한 '패키징 플랫폼'으로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삼성과 하이닉스, 그리고 한국의 팹리스 기업들이 참여하는 거대한 협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팹리스 기업과 함께 연구하고 실증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정부는 기업 간 화학적 결합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와 실증 단지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기술이 축적되고 인력이 유출되지 않으며, 신규 인력 유입도 가능해진다.

여기에 더해 패키징 기술 위에 우리가 얹어야 할 가장 강력한 필살기는 PIM(Processing-In-Memory)이다. 메모리와 연산을 분리해온 기존 구조는 AI 시대의 병목이 됐다. PIM은 연산과 저장의 물리적 분리를 축소하는 아키텍처적 전환 기술이다. 한국이 이를 세계 최초로 표준화하고 대중화한다면, 전 세계 컴퓨팅 구조는 한국산 칩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다.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과 결합된 PIM 칩은 대한민국을 단순한 부품 공급국이 아니라 AI 컴퓨팅의 '두뇌 설계도'를 쥔 기술 종주국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기업은 명운을 건 연구와 투자를 지속해야 하고, 국가는 인재 총동원령을 내려서라도 PIM 기술의 표준화와 대중화를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

반도체는 국가 안보 산업이다. 정부가 직접 전력망을 구축하고 적기에 공급하는 '에너지 국가 책임제'가 필요하다. 대만이 반도체 단지의 물과 전기를 국가 최우선 과제로 관리하듯, 우리 역시 용인·평택·아산 등 핵심 지역에서 인프라 구축을 위한 행정적·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인프라 지연은 곧 시장 상실이며, 이는 안보 공백으로 이어진다.

미국이 한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결국 사람이다. 핵심 설계·패키징 인력이 미국이나 중국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파격적인 보상과 연구 환경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 “한국에 가야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글로벌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전 세계 팹리스 기업들이 한국을 거치지 않고는 신제품을 검증할 수 없는 글로벌 테스트베드를 구축해야 한다. 전 세계 설계 데이터가 한국으로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글로벌 반도체 지형의 관제탑이 된다. 데이터는 AI시대의 원유이며, 그 흐름을 쥐는 것이 곧 힘이다.

반도체는 이제 산업이 아니라 전략 자산이다. 프라자 합의가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기회는 기다리는 자의 몫이 아니라, 기술로 선점하는 자의 몫이다. 미국이 대만에 준 혜택을 부러워하거나 좌절할 시간이 없다. 지금은 다시 한 번 승부사의 심장을 가동해야 할 시간이다.

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

PD(전 국회사무총장) 이광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