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 AI 시대, 우리는 정말 멍청해지고 있는가

“이 발명은 사람들의 영혼에 망각을 낳을 것이다.”

최신 인공지능(AI) 비평가의 말이 아니다. 2400년 전 소크라테스가 '문자'라는 신기술을 두고 한 경고다. 사람들이 스스로 기억하려 하지 않고 외부 기호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는 오늘날 “AI가 인간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걱정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이 비판을 글로 기록했다는 역설은 기술 비관론이 품은 근본적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걱정은 역사상 모든 주요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반복됐다. 인쇄술이 나오자 수도원장은 사람이 게을러진다고 탄식했다. 18세기에는 소설이 청년의 정신을 오염시킨다는 도덕적 공황이 유럽을 휩쓸었다. 라디오에 대해서는 니콜라 테슬라마저 “집중을 방해하는 골칫거리”라 했고 텔레비전은 “광대한 황무지”라는 낙인이 찍혔다. 계산기가 교실에 들어오자 암산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경고가 쏟아졌지만 수십년 간의 연구에서 체계적 해를 끼쳤다는 증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신기술은 실제로 인류를 멍청하게 만들었을까. 정반대였다. 문자는 기억력 의존을 줄인 대신 분석적 사고라는 새로운 지적 능력을 열었다. 인쇄술은 과학혁명의 토대를 놓았다. 인쇄 이전에 학자가 평생을 유클리드 원론 한 부를 찾아 헤맸다면 인쇄 이후 뉴턴은 20대에 당시 주요 수학 논문 대부분을 섭렵할 수 있었다.

20세기 내내 지능지수(IQ)가 10년마다 약 3점씩 올랐다는 '플린 효과'는 문자와 교육의 확산이 인류의 인지 능력을 전례 없이 끌어올렸음을 증명한다.

AI 시대에도 같은 구도가 보인다. 단, 결과는 사용법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120명 대학생 실험에서 챗GPT로 공부한 그룹은 45일 후 기억 보유율이 전통 학습 그룹보다 11%포인트(P) 낮았다. 스스로 고민하는 '바람직한 어려움'을 AI가 대신해 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758명 컨설턴트 대상 하버드대 실험에서는 AI 활용 그룹이 40% 높은 품질을 냈고 실력이 낮을수록 혜택이 컸다. AI를 답 기계로 쓰느냐 사고 파트너로 쓰느냐가 성패를 가른다.

한국에서도 2025년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이 추진됐으나 현장의 혼란이 이어졌고 한국교육개발원은 “AI의 교육적 가치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고를 확장하는 질문 중심 설계에 있다”고 짚었다.

다만 생성형 AI는 이전 기술과 질적으로 다르다. 책은 정보를 저장할 뿐이지만 AI는 추론까지 한다. '어디서 찾을지 기억하기'에서 '생각할 필요조차 없기'로의 전환이다. 진짜 위험은 지능 하락이 아니라 AI가 아는 것을 내가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메타인지적 착각'에 있다. 이미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자기 지식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실험적으로 확인된 바 있는데 AI 시대에 이 착각은 한층 깊어질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비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불완전했을 뿐이다. 문자는 기억력을 약화시켰지만 기억력만으로는 불가능했던 사고의 지평을 열었다. AI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부도 맹신도 아닌, 어떤 능력을 맡기고 어떤 능력을 지킬지에 대한 의식적 선택이다.

기술은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를 다르게 만들 뿐이다. 그것이 2400년 역사가 알려주는 교훈이다.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 한승문 책임연구원 smhan@keri.re.kr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 한승문 책임연구원.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 한승문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