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AI 빅테크들이 파운데이션 모델 핵심기술에 대한 특허 상호 라이선스 풀을 결성하면서, 한국이 추진 중인 '소버린 AI(주권형 AI)' 전략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향후 국내에서 자체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하더라도 글로벌 표준에 가까운 특허풀 외부에 머물 경우 로열티 부담과 협상력 약화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IP 업계에서 제기된다.
지난달 출범한 'SAIL(Shared AI License) Foundation'은 회원사 간 AI 파운데이션 모델 및 관련 소프트웨어 IP에 대해 상호 라이선스를 부여하는 협력 구조다. 현재 회원사는 Anthropic, IBM, Meta, Microsoft, Genentech, Block, Figma, eBay, TD Bank Group 등 9개사로, 영국 IP 전문 로펌 Marks & Clerk이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회원사가 보유한 관련 특허는 약 2만 건 이상으로 집계된다.
특허풀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19세기 재봉틀 산업에서 시작해 현대에는 MPEG 비디오 코덱, 3Gㆍ4G 통신 표준 등 핵심 기반기술을 둘러싸고 형성돼 왔다. Marks & Clerk은 “SAIL은 공식 표준화 기구 없이도 파운데이션 모델 IP 환경이 표준필수특허(SEP) 체제와 유사하게 진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며 “AI 산업이 '땅 따먹기식 출원' 단계를 지나 2000년대 모바일 통신 산업이 겪은 라이선스 복잡성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은 그간 AI 특허 강국으로 평가받아 왔다. 스탠퍼드대학교 AI 인덱스 등 주요 보고서에서 한국은 GDP 대비 AI 특허 등록 수 세계 1위로 꾸준히 언급돼 왔으며, 정책 당국 역시 이를 한국 AI 경쟁력의 주요 지표로 활용해 왔다.
그러나 AI 파운데이션 핵심기술 영역으로 좁혀 보면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 AI 특허 데이터 전문기업 워트인텔리전스의 분석에 따르면, AI 파운데이션 모델 핵심기술은 통상 △모델 학습 △추론 △멀티모달 △안전성 △AI 인프라 5개 영역으로 구분되며, 이들 영역의 특허 포트폴리오는 글로벌 빅테크 중심으로 빠르게 축적되고 있다.
워트인텔리전스 관계자는 “한국이 보유한 AI 특허 다수는 응용 서비스ㆍ산업 활용ㆍ하드웨어 영역에 분포돼 있다”며 “SAIL이 명시적으로 응용ㆍ하드웨어 IP를 제외하고 파운데이션 모델 기술에만 풀의 범위를 좁힌 것은 글로벌 빅테크가 이 영역의 핵심 IP 통제권을 의도적으로 결집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워트인텔리전스는 글로벌 106개국 3억 건 이상의 특허 데이터를 AI가 학습 가능한 형태로 가공ㆍ구조화하는 국내 대표 IP 데이터 기업이다. 최근 LG AI 연구원과 특허 특화 모델 고도화 협력을 진행 중이며, 산업통상자원부 'Tech-GPT' 사업과 지식재산처 AX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업계가 우려하는 것은 향후 SAIL과 같은 풀이 사실상의 산업 표준 역할을 할 경우, 풀 외부의 국내 기업이 어떤 협상 위치에 놓이게 되느냐다.
윤정호 워트인텔리전스 대표(변리사)는 “통신 산업에서 FRAND 의무가 도입되기까지 약 10년의 표준화 진통이 있었다”며 “AI 파운데이션 영역에서 SAIL이 유사한 진화 경로를 밟는다면, 국내 기업이 풀에 진입하지 못할 경우 향후 로열티 부담뿐 아니라 라이선스 협상 자체에서 구조적 약자 위치에 설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한국의 AI 특허는 양적으로는 충분하지만, 풀의 협상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는 학습ㆍ추론ㆍ멀티모달ㆍ안전성ㆍ인프라 5개 핵심 영역의 '교환 가능한 IP'를 확보해야 한다”며 “지금까지 한국이 강했던 응용 영역 특허는 풀의 협상 화폐로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윤 대표는 한국 AI 산업의 다음 과제로 특허 데이터를 보는 시야 자체의 전환을 꼽았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 AI 산업의 IP 통계는 '얼마나 많이 출원했는가'에 집중돼 있었다”며 “그러나 SAIL과 같은 풀 환경에서는 '어떤 영역의 어떤 청구항을 보유했는가'가 협상력을 결정한다. 핵심 영역의 미세한 청구항 차이까지 읽어내지 못하면 국가가 가진 IP가 협상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그는 △AI 파운데이션 핵심 5개 영역에 대한 국가 단위 IP 보유 현황 정밀 진단 △글로벌 풀 동향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 체계 △국내 기업이 보유한 IP를 풀의 협상 단위(청구항ㆍ패밀리ㆍ피인용)로 환산하는 분석 인프라 구축 등이 시급한 과제라고 짚었다.
워트인텔리전스가 자체 개발한 AI IP 분석 SaaS '키워트 인사이트'는 이러한 분석을 자동화한 도구의 한 사례다. 변리사의 추론 흐름을 데이터셋으로 구조화해 특허 청구항ㆍ패밀리ㆍ피인용 구조를 자동으로 분석하고 글로벌 경쟁사 특허 동향을 주간 단위로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키워트 인사이트는 출시 2개월 만에 90여개의 기업들이 이미 선택해서 사용되고 있다.
윤 대표는 “한국이 GDP당 AI 특허 1위라는 통계는 사실이지만 그 통계가 파운데이션 모델 협상력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며 “특허 데이터를 양적 자랑 지표가 아니라 글로벌 IP 협상의 무기로 다시 정의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업계는 최근 1~2년간 글로벌 AI 산업의 IP 쟁점이 학습 데이터 저작권 이슈에 집중돼 왔지만 SAIL 출범을 계기로 파운데이션 모델 기술 특허 영역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복수의 국내 AI 기업 IP 담당자는 “지금까지 국내 기업의 IP 전략은 자체 출원 확대에 집중돼 있었다”며 “글로벌 풀과의 상호 라이선스 가능성, M&A를 통한 핵심 IP 흡수, 국가 차원의 IP 협상력 확보 등 다각적인 전략이 동시에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특히 국가 단위 IP 진단과 협상력 분석에는 글로벌 특허 데이터를 AI가 활용 가능한 형태로 가공한 인프라가 전제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AI 기업 관계자는 “개별 기업이 단독으로 글로벌 풀 전체를 추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국가가 보유한 AI 파운데이션 핵심 IP를 한눈에 보고, 빅테크의 풀 동향까지 함께 추적할 수 있는 민관 협력 기반의 IP 분석 인프라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워트인텔리전스는 글로벌 특허 데이터를 AI Ready Data 형태로 가공하는 인프라를 국내에서 가장 깊이 구축해 온 회사”라며 “국가 차원의 AI IP 협상력 확보 과제에 워트인텔리전스의 데이터와 분석 도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원지 기자 news21g@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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