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시장을 '프리미엄'과 '스탠다드'로 나누는 승강제 방식이 인공지능(AI)과 로봇 등 딥테크 기업에 '비우량 낙인'을 찍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시가총액과 영업실적 등 단기 재무지표 중심의 분류체계가 연구개발(R&D) 중심 혁신기업의 성장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 채 시장 내 서열화를 고착화하고, 혁신기업의 자금조달 통로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벤처업계는 일본 도쿄증권거래소(JPX)의 시장 재편 과정에서 나타난 자금 쏠림과 양극화 부작용을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벤처기업협회·한국벤처캐피탈협회·코리아스타트업포럼 등 3개 단체는 15일 서울 여의도에서 '혁신경제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자본시장' 기자간담회를 열고 금융당국에 자본시장 개편 관련 5대 정책과제를 공식 제안했다.

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금융당국이 추진 중인 코스닥 승강제(세그먼트 개편)다. 취지와 달리 시장 내 자금과 관심, 유동성이 프리미엄 세그먼트로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스탠다드 시장은 기관투자자 외면과 유동성 경색, 기업가치 저평가를 겪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AI와 로봇, 바이오 등 딥테크 기업은 상용화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만큼 초기에는 단기 실적보다 기술 축적과 연구개발(R&D) 성과가 중요하다. 하지만 시가총액과 영업실적 중심으로 시장을 구분할 경우 기술력과 무관하게 하위 시장으로 분류돼 '비우량 기업'이라는 낙인효과를 떠안을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VC업계는 승강제 도입 이후 기업이 프리미엄 시장 진입과 잔류를 위해 시가총액 방어와 단기 실적 관리에 집중할 가능성도 우려했다. 장기적인 연구개발과 모험자본 투자가 필수적인 AI·딥테크 기업이 혁신 투자보다 실적 개선에 매달리면 성장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상장 준비 기업의 부담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신규 상장 기업을 두고 상장 전부터 스탠다드 편입 가능성이 거론되면 수요예측과 공모가 산정, 기관투자자 참여 과정에서 불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업계는 일본 JPX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제시했다. 일본은 2022년 프라임·스탠다드·그로스 시장으로 재편했지만, 최상위인 프라임 시장으로 자금이 쏠리며 스탠다드 시장의 낙인효과와 그로스 시장의 자금조달 부진, 기관투자자 외면 등 양극화 부작용이 나타났다.

송병준 벤처기업협회장은 “이는 막연한 우려가 아니라 이미 일본 시장에서 증명된 부작용”이라며 “우리도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코스닥의 문제는 시장을 쪼개지 않아 생긴 것이 아니라 혁신기업이 제대로 평가받고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면서 “지금 코스닥에 필요한 것은 서열적 명칭으로 기업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저평가된 혁신기업의 특성과 잠재력을 다각도로 평가하고 실질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 정교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김학균 한국VC협회장도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 시대에는 모험자본이 투자한 기업이 코스닥을 거쳐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성장 사다리가 필요하다”며 “코스닥은 단순한 회수시장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대체 불가능한 핵심 플랫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VC의 상장사 투자 한도가 펀드 규모의 20%로 제한된 상황에서 시장마저 쪼개지면 유동성은 프리미엄 기업으로만 쏠리고 스탠다드 기업들은 후속 투자와 기관 자금이 끊기는 자금 절벽에 직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 회장은 또 “2010년도에 나스닥에 상장한 테슬라의 경우 10년간 적자였는데도 109억달러를 투자받아 글로벌 기업이 됐다”며 “우리는 이러한 투자 시스템 자체가 없는 상황인 만큼, 코스닥 시장 전반에 나스닥과 같은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한 30조원 규모 이상의 코스닥 활성화 펀드 조성 등도 함께 추진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업계는 이미 낮은 유동성과 투자자 관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코넥스 사례를 언급하며 “코스닥 내 추가적인 하위 세그먼트가 도입될 경우 사실상 또 하나의 코넥스가 생겨 저평가와 자금조달 위축 문제가 재현될 수 있다”고 밝혔다.
김재원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의장은 “규제는 시장을 지키는 둑이지만 너무 높이 쌓으면 물길마저 마른다”며 “부실은 정리하되 혁신기업의 자금조달 통로는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코스닥 세그먼트 분리 정책의 시행 유예와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는 한편, 세그먼트 도입이 불가피할 경우 시가총액·매출·영업이익 등 재무지표뿐 아니라 업종별 상용화 주기를 반영한 '기술성장성 트랙'을 신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상장 당시 제시한 기술개발 마일스톤 달성 여부 등을 핵심 평가 기준으로 활용해 단기 실적 부진에 따른 기계적 강등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다.
이와 함께 △중복상장 금지 예외 적용 △2027년 시행 예정인 시가총액 300억원 상장폐지 기준 유예 및 재검토 △금융당국·한국거래소·정부·업계가 참여하는 '생산적 금융 정책협의체' 상설화 △기술특례상장 제도 보완 등을 포함한 5대 정책과제를 제지했다.
금융당국과 업계 간 상설 소통 채널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송 회장은 “현장과 소통하지 않은 정책은 시장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했고, 김 회장 역시 “제도 설계의 첫 단추부터 현장과 소통한다면 불필요한 규제 저항과 시장 혼란을 막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성현희 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