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터리 산업을 취재하면서 반복적으로 듣는 단어가 있다. '캐즘'이다. 전기차 수요가 일시적으로 정체된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 국내 배터리 산업의 어려움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인다.
하지만 기자가 만난 한 배터리 관련 기업 대표의 진단은 달랐다. 그는 전기차와 배터리 시장이 캐즘에 빠진 것이 아니라고 봤다. 전기차 수요는 여전히 늘고 있고, 문제는 시장 부진이 아니라 중국 대비 한국 배터리 관련 기업의 경쟁력 약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중국은 품질·가격·납기(QCD) 측면에서 한국을 앞서고 있으며, 특히 가격 경쟁에서는 국내 기업이 따라가기 어렵다는 평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배터리 산업 상장사 상당수는 지난해 신규 수주 없이 과거 수주분으로 매출을 이어왔고, 일부는 수주 취소까지 겪었다. 올해 상반기에도 수주가 부진하면 내년부터 실적 공백이 본격화될 수 있다.
그렇다고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자동차를 넘어 에너지저장장치(ESS)와 로봇, AI 데이터센터 등에서 배터리 수요는 계속 늘어난다. 국내 부품, 장비 기업도 소재와 공정, 생산성 혁신을 통해 원가를 낮추며 사업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의 역할은 이 지점에서 중요하다. 시장이 성장해도 국내 기업의 몫이 자동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가격 경쟁이 심화된 상황에서 기업 개별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공정 전환과 소재·장비 내재화, 해외 공급망 대응을 정책이 뒷받침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미국·유럽의 공급망 재편과 중국산 제품 규제는 한국 배터리 산업에 위기이자 기회다. 금융과 세제, 연구개발, 통상 대응을 묶은 지원책이 필요한 이유다.
캐즘이라는 말로는 지금의 위기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 배터리 산업에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정부와 기업이 마지막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시장 회복을 기다리는 수준을 넘어, 경쟁력 회복을 위한 구조 전환에 속도를 내야 한다.
김명희 기자 noprin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