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중복상장 규제, 시장 위축…혁신기업 별도 심사해야”

벤처·VC업계, 보완책 요구
상장예비심사 지연기업 늘어
VC 회수·재투자 선순환 막아
3%룰 완화·절차 간소화 필요

중복상장 규제안과 벤처·VC 업계 개선 요구사안
중복상장 규제안과 벤처·VC 업계 개선 요구사안

벤처·벤처캐피털(VC) 업계가 금융 당국의 중복상장 규제 강화안에 대해 벤처기업의 성장과 투자 회수 구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과잉규제라며 제도 보완을 요구했다. 성숙 사업을 떼어내 상장하는 이른바 '쪼개기 상장'은 엄격히 규율하되 신사업 진출이나 외부 기술 확보,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한 혁신기업에는 별도 심사체계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규제 기준 구체화와 사전협의 절차 도입 등도 함께 건의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벤처·VC업계는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가 예고한 '중복상장 원칙금지' 관련 거래소 규정 개정안과 가이드라인 제정안에 대해 각각 의견서를 제출했다. 금융 당국은 이날까지 업계 의견을 수렴한 뒤 이달 말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을 최종 확정할 예정이다.

업계는 성숙 사업을 분리, 상장하면서 모회사 일반주주의 가치가 훼손된 사례를 규율하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자회사 설립 경위와 성장 단계, 사업 독립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중복상장에 동일한 규제를 적용하면 벤처·스타트업의 성장과 투자시장에 과도한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중복상장 논란으로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하고도 심사가 장기간 지연되는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에너지 소재·부품·장비 기업 '디티에스'는 코스닥 상장사 다산네트웍스를 모회사로 두고 있지만 사업영역이 전혀 다르다. 지난해 9월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했지만 심사가 지연되고 있다.

우주항공·정밀항법 전문기업 '덕산넵코어스'도 반도체 패키징 소재 기업 덕산하이메탈이 M&A를 통해 인수한 기업이다. 모회사와 사업영역이 구분되지만 지난해 11월 상장예비심사 청구 이후 심사가 장기화하고 있다.

업계는 이들 기업이 모회사의 성숙 사업을 떼어낸 자회사가 아니라 별도 사업을 영위하거나 M&A를 통해 편입된 혁신기업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쪼개기 상장과 구분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진=한국거래소
사진=한국거래소

벤처·VC업계가 공통으로 제기한 문제는 과도한 절차 부담과 제도의 불확실성이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모회사 이사회의 5대 의무 이행과 독립 특별위원회 구성, 3%룰 기반 주주동의 절차 등이 상장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늘리고 자금조달 적기를 놓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비중 자회사 예외 기준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봤다. 매출과 자산은 작지만 기술력과 성장성으로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딥테크 기업은 오히려 중요 자회사로 분류돼 예외 적용을 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업계는 거래소의 재량적 판단을 줄일 수 있도록 심사 기준과 입증자료, 예외 요건을 구체화하고 상장 추진 전에 규제 대상 여부와 적용 절차를 확인할 수 있는 사전협의 제도를 도입해 달라고 요구했다. 거래소 내 전담기구 설치와 기존 투자·상장 준비 기업에 대한 소급 적용 배제도 공통 건의사항에 포함됐다.

특히 벤처업계는 신사업 진출과 외부 기술 확보, M&A 이후 사업화를 위해 설립·편입된 벤처확인기업에는 코스닥시장 별도 심사트랙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독립적인 사업모델과 외부 투자 유치, 기술개발 투자, 고용·매출 성장 등을 기준으로 쪼개기 상장과 구분하자는 취지다.

또 벤처기업에 대해서는 3%룰 기반 주주동의 요건을 일반결의 수준으로 완화하고 자회사 규모와 비중에 따라 특별위원회 구성과 주주영향평가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해외 상장도 글로벌 성장자본 확보를 위한 수단인 만큼 국내 주주 보호장치를 전제로 국내 중복상장 규율과 구분해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VC업계는 중복상장 규제가 벤처투자 회수시장 전반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내 벤처투자 회수에서 기업공개(IPO)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상장 모회사를 둔 기업의 IPO가 제한되면 회수 기간이 길어지고 펀드 수익성과 재투자 여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대·중견기업의 벤처기업 M&A와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투자도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CVC가 지분 20% 이상을 보유한 투자기업이나 매출은 작지만 예상 기업가치가 높은 딥테크 기업은 저비중 자회사 예외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VC업계는 벤처투자조합 등 외부 전문투자자가 일정 지분 이상을 보유하거나 일정 금액 이상 투자한 기업은 중복상장 심사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외부 전문투자자의 참여는 해당 기업이 모회사와 별도로 시장에서 기업가치를 검증받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반도체·바이오·인공지능(AI) 등 국가전략산업 기업과 외부 기술기업을 M&A한 사례도 예외로 인정하고, 자금조달 수단이 제한적인 중견·중소기업 계열사에는 대기업집단과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규제 시행 전 투자를 마쳤거나 상장을 준비 중인 기업에는 최소 3년의 유예기간을 부여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업계 관계자는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쪼개기 상장에는 강한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미래 신사업을 육성하고 성장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길까지 막아서는 안 된다”며 “한국판 웨이모, 모빌아이와 같은 기업들이 등장하려면 기업들에게 충분한 넓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현희 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