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반복적인 실험에 의존하던 소재 연구에 인공지능(AI)이 새로운 연구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려면 수많은 조성과 공정 조건을 바꿔가며 실험하고 분석을 반복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축적된 연구 데이터를 AI가 분석해 유망한 후보와 공정 조건을 찾아내고 실험에 앞서 소재의 특성과 성능을 예측하는 방식이 가능해지면서 소재 연구의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한국재료연구원(KIMS·원장 최철진)은 올해 AI를 소재·공정 전반에 접목해 이러한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소재 설계와 물성 예측에서 제조 공정의 품질 관리, 소재 손상과 수명 예측에 이르기까지 AI 활용 범위를 넓히고 대학·산업계와 협력해 소재 AI 연구 기반을 강화하는 중이다. 궁극적으로는 AI와 데이터, 자동화된 실험장비를 연결해 시행착오를 줄이고 개발 속도를 높이는 새로운 연구 환경으로의 전환을 지향한다.
소재 연구에서 AI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탐색 속도'에 있다. 전통적인 소재 개발은 연구자가 조성과 공정 조건을 바꿔가며 실험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다음 실험을 결정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변수가 많아질수록 가능한 조합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AI는 방대한 실험·계산 데이터를 학습해 원하는 성능이 나타날 조건을 예측하고 연구자가 우선 확인할 후보를 좁힌다. 단순히 연구자를 대체하기보다 효율적으로 가설을 세우고 실험 설계를 돕는 새로운 도구인 셈이다.
KIMS는 소재 조성과 공정, 미세조직, 물성 사이의 관계를 AI와 데이터로 분석해 시행착오 중심의 소재 연구를 보다 빠르고 정밀한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문장을 입력하면 그림을 그려주는 생성형 AI가 소재 연구에도 등장했다. 금속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봤을 때 나타나는 작은 알갱이의 크기와 모양, 배열을 '미세조직'이라고 하는데 같은 금속이라도 미세조직에 따라 강도와 연성 등 성질이 달라진다.
문제는 미세조직 사진 한 장을 얻는 데도 시편을 만들고 갈고 닦아 전자현미경으로 찍는 긴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열처리 온도나 시간을 조금만 바꿔도 조직이 달라지기 때문에 조건이 바뀔 때마다 실험을 되풀이해야 했다.
이호원 재료데이터·분석연구본부 박사 연구팀은 생성형 AI에 금속 미세조직 사진을 학습시켜 열처리 온도와 시간 등의 조건을 입력하면 해당 조건에서 나타날 미세조직을 AI가 그려내는 기술을 개발했다. 그 결과 비교적 적은 사진만으로도 실제 현미경 사진과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의 결과를 얻었다.
연구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원하는 강도와 늘어나는 성질을 제시하면 이를 만족하는 미세조직을 AI가 3차원(3D)으로 직접 만들도록 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데이터로 AI를 먼저 학습시킨 뒤 소량의 실험 데이터로 보완해 데이터 확보 부담도 줄였다.
AI가 실제 소재 제조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박정민 나노재료연구본부 박사 연구팀은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공동으로 금속 3D프린팅 부품 내부 결함과 이에 따른 성능 변화를 사전에 예측하는 AI 모델을 개발했다.
금속 3D프린팅은 항공, 우주, 국방, 에너지 산업 등에서 주목받지만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내부 결함이 성능 저하와 파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결함의 양뿐 아니라 크기와 모양, 위치와 분포에 따라 성능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 품질 예측이 쉽지 않았다.
연구팀은 철강, 알루미늄 합금, 타이타늄 합금 등 공정 조건과 분말 특성, 결함 이미지, 기계적 물성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켜 '공정조건-결함형상-기계적성능'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예측하는 모델을 구축했다.
특히 기공의 크기와 비원형성, 공간적 분포 등을 분석해 어떤 결함이 실제 성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는 AI(Explainable AI) 모델을 구현했다. 결과만 제시하는 블랙박스 AI와 달리 특정 공정 조건에서 결함이 증가하고 성능이 저하되는 이유까지 분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공정 설계 단계에서 결함 발생 가능성과 성능 변화를 예측하고 품질을 사전에 제어할 수 있다. 연구팀은 향후 이를 디지털트윈 기반 품질 관리 기술로 확장할 계획이다.
AI의 활용은 소재 제조를 넘어 실제 산업 환경에서 안전성과 손상 위험을 판단하는 영역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장영준 극한재료연구소 박사 연구팀은 현재 차세대 친환경 선박인 암모니아 추진선에 고강도 철강재를 안전하게 적용하기 위한 국내 최초 '무수 암모니아 응력부식균열(SCC) 통합평가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암모니아 환경에서는 강재에 응력부식균열이 발생할 수 있어 장기간 안정성을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팀은 실제 선박의 무수 암모니아 저장-운용환경을 모사해 강재와 용접부의 SCC 발생 및 진전 거동을 분석하고 전기화학 분석과 가속시험을 통해 SCC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자를 규명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확보한 시험 결과와 환경 조건, 소재 특성 및 손상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축적하고 향후 AI를 활용해 다양한 환경에서의 SCC 발생 가능성과 손상 위험을 예측하는 기술로 확장할 예정이다.
아직 연구개발 단계지만 소재의 제조와 품질 예측을 넘어 실제 사용환경에서 '어떤 조건에서 손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지'를 AI와 데이터를 활용해 예측하는 연구로의 확장을 보여준다.
KIMS는 올해 2월 서울대학교와 'KIMS-서울대 소재 AI 연구센터'를 출범하고 서울대의 기초 연구 역량과 KIMS의 응용·실증 인프라를 연결해 재료 전 분야의 소재·공정 설계 AI 연구를 공동 추진하고 있다.
핵심은 실험-이론-데이터-AI 모델을 하나의 연구 체계로 연결하는 것이다. 기초 연구에서 얻은 원리와 데이터를 AI 모델로 발전시키고 이를 실제 소재와 공정에 적용·검증하는 선순환 구조 구축이 목표다.
양 기관은 상호 방문 연구와 공동 세미나 등을 통해 소재와 AI를 동시에 이해하는 융합형 연구인력도 양성할 계획이다.

소재 AI를 본격적으로 확산하려면 데이터와 AI 모델, 실험 인프라와 산업 현장을 연결하는 협력 생태계가 꼭 필요하다. KIMS가 올해 6월 개최한 '제1회 소재 AI 기술 포럼'도 산·학·연 협력 기반 마련의 일환이다.
포럼에서는 금속소재 조성·공정 자동설계용 초거대 AI, 머신러닝 기반 멀티피직스 모델링, AI·데이터 기반 무인 연구실, 거대언어모델(LLM)·에이전틱 AI, AI 기반 소재 발견을 위한 문헌 데이터 활용 등 소재 연구와 AI가 만나는 다양한 기술을 논의했다.
AI의 역할이 물성 예측을 넘어 소재 설계와 공정 최적화, 연구 데이터 활용, 실험 자동화·지능화 등 연구 전 과정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소재 AI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연구 환경 중 하나는 KIMS가 현재 구축 중인 자율 실험실 '오토노머스 랩(Autonomous Lab)'이다.
KIMS 오토노머스 랩에서는 연구자가 원하는 재료의 목표 특성을 입력하면 AI가 가능성이 높은 실험 조건을 제안하고 로봇이 시편 제작과 열처리, 분석 등을 수행한다. 실험 결과는 다시 AI가 학습해 다음 실험 조건을 찾는 데 활용된다.
핵심은 'AI 기반 실험 설계-로봇 실험 자동화-실시간 데이터 분석-다음 실험 설계'가 하나의 순환구조로 연결되는 것이다. 반복적인 소재 탐색 및 실험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대신 연구자는 새로운 가설과 연구 목표를 설정하고 결과의 과학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이 같은 시스템의 장점은 빠른 실험 수행에만 그치지 않는다. 실험 데이터를 끊임없이 누적하고 분석해 AI가 스스로 학습하면서 정교한 실험 설계까지 가능하다. 일종의 강화학습 알고리즘처럼 작동하는 셈이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전주기 자동화 연구 환경을 갖췄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반도체, 이차전지, 수소에너지 등 첨단산업뿐만 아니라 국방, 우주, 친환경 소재 개발 등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인적 자원의 한계를 보완하고 숙련된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고난도 실험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자율 실험실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KIMS는 오토노머스 랩을 다양한 제조 공정과 분석 기술로 확장하고 멀티모달 AI 모델과 연동하는 등 소재 연구의 자동화·지능화를 지속해서 고도화할 예정이다. 단순히 연구실의 효율을 높이는 도구를 넘어 국가 소재 기술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핵심 플랫폼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목표다.
올해 KIMS가 선보인 생성형 AI 기반 소재 설계와 금속 3D프린팅 품질 예측 기술, 소재 AI 연구센터와 기술 포럼, 현재 추진 중인 소재 손상·수명 예측 연구는 서로 다른 분야의 성과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경험과 반복 실험 중심의 소재 연구를 AI와 데이터를 활용해 '예측과 설계의 연구'로 바꾸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AI가 방대한 연구 데이터에서 유망 후보를 찾고 자동화된 실험 시스템이 이를 검증하며 새롭게 얻은 데이터를 다시 AI가 학습하는 연구 환경으로 잇게 된다.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은 새로운 산업기술이 탄생하는 시간 역시 앞당길 수 있다는 의미다.
최철진 원장은 “KIMS는 그동안 축적해 온 연구 데이터와 실험·평가 인프라, 소재 전문성을 AI와 연결해 소재 개발 속도와 정확도를 높이고 대한민국 소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창원=노동균 기자 defros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