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자율주행, 빨리 가려면 안전하게 가야 한다

정대진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장
정대진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장

지난 8월 오픈AI는 사이버 위험이 커지자 인공지능(AI) 모델의 역량이 안전을 위한 모니터링·정렬·보안 역량을 앞질러서는 안 된다며, 일부 대규모 학습을 잠시 멈추고 개발 속도를 조절하는 '페이싱(pacing)'에 나섰다. 개발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속도와 안전 역량을 함께 끌어올려야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필자에게 이 말은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지금 한국 자율주행 산업이 마주한 질문과 정확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웨이모·죽스(Zoox) 등이, 중국에서는 바이두·포니.AI 등이 무인 로보택시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안전관리자가 동승하는 실증이 중심이다. 해외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왜 우리는 안 되느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해외 브랜드의 감독형 자율주행 기능까지 화제가 되면서 조바심도 커졌다.

그 원인을 흔히 규제에서 찾는다. 그러나 규제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현실이 복잡하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7월 최소 1만5000km 실증주행과 원격관제 등을 요건으로 하는 무인 자율주행차 안전운행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문제는 규제의 유무보다 기술개발과 실증, 데이터 축적, 안전 검증, 상용화를 하나의 선순환 구조로 연결하는 제도와 산업 생태계가 얼마나 촘촘하게 갖춰져 있느냐에 있다. 원인을 잘못 짚으면 처방도 엇나간다.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다. 글로벌 경쟁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운전대와 페달 없이 처음부터 무인운행을 전제로 설계된 죽스 로보택시에 연간 최대 2500대, 2년간 상업운행을 위한 임시 면제를 허용했다. 사람이 운전한다는 전제로 만들어진 자동차 규제의 틀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L3·L4 자율주행 시스템의 안전요건을 담은 강제 국가표준을 확정해 2027년 7월 시행한다. 유엔 자동차기준세계조화포럼(WP.29)도 지난 6월 세계 최초로 자율주행시스템 국제 기준을 채택했다.

무인 자율주행차 안전운행 요건 가이드라인 주요 내용
무인 자율주행차 안전운행 요건 가이드라인 주요 내용

실증의 특례로 출발했던 나라들이 표준화와 제도화 단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운전대 없는 완전자율주행차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의 책임체계, 원격지원과 개입의 범위, 데이터의 수집·활용 원칙 등을 지금부터 정비해야 기술이 준비됐을 때 곧바로 시장으로 나갈 수 있다. 기술만 앞서면 갈 곳을 잃고, 제도만 앞서면 서랍 속 서류로 남는다. 안전은 속도를 늦추는 이유가 아니라, 속도를 낼 수 있게 하는 전제다.

우리 기업들도 사력을 다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자율주행 미디어데이에서 두 갈래의 로드맵을 공개했다. 엔비디아와 협력해 2028년 상반기 L2+, 하반기 L2++ 양산에 나서고, 동시에 자체 개발한 '아트리아 AI'를 적용한 L2++ 차량을 2029년 하반기 양산한다는 계획이다. 아트리아 AI 차량이 강남·잠실 등 복잡한 도심을 주행하는 영상도 공개했다. 포티투닷은 시각·언어·행동을 통합한 VLA(Vision-Language-Action) 기반 차세대 기술개발계획도 밝혔다.

눈에 띄는 대목은 현대차그룹이 '누가 먼저 내놓느냐'의 경쟁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점이다. 박민우 현대차·기아 AVP본부장은 서둘러 양산하면 어정쩡한 L2++가 나올 수 있다며 “전략적으로 일정을 늦춰 잡았다”고 밝혔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서둘러 내놓았다가 사고와 리콜에 발목이 잡히면 몇 달을 앞서려다 몇 년을 잃을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제대로 준비하는 것이 가장 빨리 가는 길일 수 있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7월 가이드라인으로 무인 운행의 기본 요건이 마련된 만큼, 이제는 그 기반 위에서 후속 제도와 인프라를 속도감 있게 갖춰 나가야 한다. 광주 실증도시 사업을 통해 실도로 데이터를 대규모로 확보하고 이를 기업의 AI 학습으로 연결하는 기반을 확충하는 한편, 국내 제도를 국제기준의 변화에 맞춰 속도감 있게 '현대화'해야 한다. 국제기준을 반영한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조속히 마련하고, 7월의 가이드라인이 기술 발전 속도에 맞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주행영상과 데이터의 안전한 활용 기준을 명확히 하고, AI 학습에 필수적인 GPU와 데이터센터 등 컴퓨팅 인프라를 확충하는 일도 시급하다. 이는 안전 규제를 없애 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가이드라인에서 출발해, 기업이 어떤 조건을 충족하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예측 가능한 규칙으로 단계적으로 이어 가자는 것이다.

자율주행 경쟁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치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다. 아무리 급해도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도로에 올릴 수는 없다. 그러나 안전을 이유로 변화 자체를 늦춰서도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속도와 안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자율주행의 승부는 누가 먼저 운전대를 없앴느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술은 빠르게 개발하되 안전 검증은 더 정교하게 하고, 기업은 과감하게 투자하되 정부는 그 기술이 달릴 도로와 규칙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힘을 맞출 때 추격도, 도약도 가능하다.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기술은 가장 빨리 출발한 기술이 아니라 국민이 안심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술이다. 자율주행 시대, 가장 빨리 가는 길은 결국 가장 안전하게 가는 길이다.

정대진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장 hajdj69@kama.or.kr

〈필자〉1993년 제37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상공자원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통령비서실 선임행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관, 투자정책관, 통상정책국장 등을 역임했다. 통상차관보로 재임하며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대응 실무를 총괄했다. 이후 서울대 과학기술미래연구센터 연구위원과 서강대 산학협력중점교수로 활동했다. 올해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 제19대 회장으로 취임해 자동차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미래모빌리티 전환을 위한 정책 대응과 업계 협력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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