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퀄컴 `20년 불공정 관행` 깼다

신영선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이 퀄컴의 공정거래법 위반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신영선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이 퀄컴의 공정거래법 위반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퀄컴 제재는 1조원이 넘는 과징금 부과보다 시정명령에 큰 의의가 있다. 퀄컴이 모뎀칩셋·라이선스 시장에서 장기간 독점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수단인 `부당한 사업 모델` 자체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국내외 휴대폰·칩셋 업체는 비로소 퀄컴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 테이블에 나설 수 있게 됐다. 공정한 시장 경쟁 촉진으로 휴대폰 소비자에게도 직간접 혜택이 돌아갈 것으로 기대된다.

◇20년 `불공정 관행` 깼다

휴대폰 업계는 퀄컴이 칩셋이 아닌 휴대폰 단계에서 특허 라이선스 비용을 받는 `20년 관행`에 문제가 있다고 꾸준히 지적했다. 퀄컴이 부품(칩셋)에 필요한 특허를 제공하면서 기기(휴대폰) 판매에 비례, `과도한 로열티`를 챙긴다는 주장이다.

퀄컴은 공정위와의 공방 과정에서 자사에만 한정되지 않는 `시장 관행`이라고 맞섰다. 공정위 역시 기기 단계의 라이선싱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판단이다. 그 대신 기기 단계 라이선싱이 유지될 수밖에 없게 된 근본 원인인 `부당한 사업 모델`을 고쳐 20년 동안 유지된 불공정 관행을 깨뜨렸다.

퀄컴은 이동통신 표준기술인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광대역코드분할다중접속(WCDMA), 롱텀에벌루션(LTE) 관련 국제 표준화 기구인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에 프랜드(FRAND) 확약을 선언한 표준필수특허(SEP) 보유자다. FRAND 확약은 SEP 보유자가 특허 이용자에게 공정, 합리, 비차별 조건으로 라이선스를 제공하겠다고 보장하는 약속이다. 그러나 퀄컴은 경쟁 칩셋 업체에 라이선스를 아예 주지 않거나 제한 제공, 약속을 어겼다.

신영선 공정위 사무처장은 28일 “삼성, 인텔, 비아 등이 이동통신 SEP 라이선스 계약 체결을 요청했지만 퀄컴이 거절했다”면서 “미디어텍 등 경쟁 칩셋 업체도 완전한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요청했지만 라이선스 대상 권리를 제한하는 불완전 계약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퀄컴이 SEP를 경쟁 칩셋 업체에 제공하지 않는 것은 휴대폰 업체에 특허료를 받는 사업 모델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퀄컴은 SEP 보유자인 동시에 모뎀 칩셋을 제조·판매하는 수직 통합 독과점 사업자다. 퀄컴은 라이선스 사업부인 QTL과 모뎀 칩셋 사업부인 QCT를 별도 법인으로 분리, 운영한다. QTL이 SEP를 경쟁 칩셋 업체에 제공하지 않고, QCT가 휴대폰 업체에 모뎀 칩셋을 판매하면서 QTL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QTL과 QCT는 별도 법인이지만 한 몸같이 움직였다.

퀄컴은 이런 사업 모델을 기반으로 수익을 극대화하고 독점 시장 지배력을 유지했다. 자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지 않으면 휴대폰 업체에 모뎀 칩셋을 공급하지 않는다. 휴대폰 업체가 다른 업체로부터 모뎀 칩셋을 공급받을 수 있으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다른 모뎀 칩셋 업체는 퀄컴으로부터 SEP를 제공받지 못해 언제라도 특허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 휴대폰 업체는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업체로부터 모뎀 칩셋을 구매할 수가 없다.

퀄컴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칩셋에 구현되는 이동통신 SEP와 기타 특허, 2G·3G·4G 등 이동통신 표준별 SEP을 구분하지 않았다. 특허 전체를 한꺼번에 라이선스로 제공했다. 휴대폰 업체는 특허 선별 구매가 불가능했다.

동시에 퀄컴은 휴대폰 업체가 취득한 특허를 무상으로 교차 라이선스하도록 요구했다. 공짜로 받은 교차 라이선스를 자사 칩셋 구매 업체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퀄컴과 거래하는 업체만 특허 침해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특허 우산`을 제공한 것이다.

신 처장은 “휴대폰 업체가 퀄컴 칩셋을 구매하면 약 200개의 다른 특허권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로열티를 면제받는 특허 우산 효과를 누린다”면서 “경쟁사 칩셋을 사면 다른 휴대폰 업체의 특허에 별도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경쟁 칩셋 업체는 능률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꼬집었다.

신영선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이 퀄컴의 공정거래법 위반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신영선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이 퀄컴의 공정거래법 위반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휴대폰 시장 `큰 변화`

시정명령이 받아들여지면 휴대폰 시장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예컨대 삼성, LG, 애플 등 휴대폰 업체가 퀄컴과 직접 거래를 끊고 퀄컴으로부터 SEP를 제공받은 인텔 등 칩셋 업체와 새롭게 거래를 할 수 있다. 모뎀 칩셋 시장에서 퀄컴의 독점 지위가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공정위가 퀄컴에 “모뎀 칩셋 업체가 요청할 때 특허 라이선스 계약 협상에 성실히 임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경쟁 칩셋 업체에도 차별 없이 SEP를 제공하라는 의미다.

공정위는 “통상의 업계 관행과 선의에 따라 양사가 합의하는 기간에 충분히 협상, 최종 라이선스 계약안을 도출하라”면서 “당사자 간 계약 체결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독립된 제3자 결정을 요청, 이에 따라야 한다”고 명령했다. 퀄컴과 경쟁 칩셋 업체 간 합의가 불발될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공정위는 모뎀 칩셋 공급을 볼모로 퀄컴이 휴대폰 업체에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강요하지 않도록 하고, 관련 계약 조항을 수정·삭제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휴대폰 업체와 특허 라이선스 계약 시 부당한 계약 조건 강요를 금지했다. 휴대폰 업체 요청이 있으면 기존의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재협상하도록 했다.

공정위는 시정명령 적용 범위를 `국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자`로 정했다. 한국 업체뿐만 아니라 국내에 휴대폰을 판매하는 제조·판매사 등도 포함시켰다. 휴대폰 업체 가운데에는 삼성이나 LG 등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애플, 화웨이 등 해외 기업도 퀄컴과 재협상을 추진할 수 있다. 칩셋 업체 가운데에는 삼성, 인텔, 미디어텍, 비아 등이 퀄컴과 라이선스 계약 협상이 가능해졌다.

재협상 결과에 따라 휴대폰 시장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 전반으로는 공정한 시장 경쟁이 촉진돼 최종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 평가대로 왜곡된 휴대폰 연구개발(R&D) 혁신 경쟁이 바로잡힘으로써 신기술 발굴·개발도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신 처장은 “이번 시정명령은 `퀄컴을 배타 수혜자로 하는 폐쇄 생태계`를 `산업 참여자가 누구든 자신이 이룬 혁신 인센티브를 누리는 개방 생태계`로 돌려놓기 위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