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로봇 디자이니즘과 디자인의 미래

안진호_교수
안진호_교수

인공지능(AI)에 기반을 둔 소프트웨어(SW)는 인터넷 각종 데이터를 수집, 정리한 후 알고리즘으로 분류하고 의미를 해석해 기사화한다. 이를 '로봇 저널리즘'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4차 산업혁명으로 지금 대다수의 일자리가 없어지지만 인간의 창의 영역만은 기계가 대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는 사건이다.

이 같은 사례는 유사한 지식 서비스 개념인 디자인에서도 가능함을 보여 준다. 다양한 제품의 외형, 색깔, 재질, 사용자 취향과 반응 등 디자인에 필요한 빅데이터를 수집·분석·활용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하면 가능하다. 그리고 3D프린터·가상현실(VR)·증강현실(AR)과 같은 시각화 기술은 디자이너가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것보다 수십 배는 빠르고 정교하며, 색다른 시안을 더 많이 만들어 낼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도 소멸하는 직업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디자이너는 창의 사고력을 지닌 비즈니스 필수 인력으로, 가치가 증대할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디자인 인식과 관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는 선진 국가와 우리나라 간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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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디자인이란 도구가 아니라 문화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면서 디자인은 그들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다. 미국 플랫폼 기반의 비즈니스로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는 대다수 기업이 디자인 전문 기업을 인수하거나 디자이너를 주요 임원으로 영입한다. 그들은 창의 아이디어를 만들고, 그것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현실화하는 일을 담당한다.

혁신 아이콘으로 불리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 날개 없는 선풍기로 유명한 다이슨의 제임스 다이슨 모두 디자이너 출신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잡스와 다이슨이 우리가 알고 있는 디자인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디자이너에게 있는 창의 사고 능력으로 혁신 비즈니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을 아이데오(IDEO) 같은 디자인 기반의 경영컨설팅 기업은 '디자인 싱킹'이라는 혁신 기법으로 정립했다. 독일에서 4차 산업혁명 핵심인 스마트공장을 기획, 설계하는 다국적 정보기술(IT) 기업 SAP에서도 디자인 싱킹의 중요성과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고 있는 미국, 독일의 공통점은 디자인이 그리는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 내는 최고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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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상황을 살펴보면 디자인은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이 때문에 디자인이란 하면 좋지만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우리에게 디자인이란 충분 조건이지 필수 조건은 아니다.

삼성, LG 등 대기업의 디자인 역량은 인력 자원, 개발투자비, 인프라 구축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세계를 먼저 선도하는 디자인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디자인은 결과물에 한한다면 최고 수준이지만 1등이나 선도하는 통찰력은 있지 못하다.

이런 결과는 우리가 아직도 디자인 가치를 문화 수준에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디자인을 상업미술이라는 관점에서 마케팅 수단으로만 인식한다. 디자인은 단순히 제품을 외형미로 만들어 주는 과정을 지칭하는 것보다 더 포괄된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다. 여기에는 만들어 내고 개발하는 계획의 의미도 있고 여기에 맞춰 결과물을 만드는 행위 자체를 포괄하기도 한다. 즉 완성하려는 사물이나 행위를 위한 준비 계획 결정 과정이 바로 디자인이다.

'DESIGN'이라는 철자를 분석해 보면 'DE'와 'SIGN'이 조합된 것이다. 'DE'는 무엇인가를 분리해 내는 행위로, 생각한다는 의미의 제안이나 계획을 뜻한다. 이것을 시각화해서 실행에 옮기는 행위와 결과, 즉 제안이나 계획을 그리는 것이 'SIGN'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처럼 'SIGN' 중심으로 디자인 가치를 인식하고 판단한다면 로봇 디자이니즘은 디자인계에 재앙이다. 'DE'와 'SIGN'의 조화로 해석한다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디자이너에게 충분한 '사유(思惟)'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고, 창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는데 주도할 수 있게 해 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창의력을 기반으로 하는 소프트파워 시대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디자인에 있는 본연의 의미를 인식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인 가치가 지금처럼 수단으로만 여겨진다면 디자이너는 언젠가 대한민국에서 사라질 직업의 하나일 뿐이다.

안진호(pibuchi@gmail.com) 디자인칼럼니스트, 국민대 겸임교수(경영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