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기업, 그들은 한국에 무엇인가]<8>무엇이 그들을 문제아로 만들었나

[글로벌기업, 그들은 한국에 무엇인가]<8>무엇이 그들을 문제아로 만들었나

“수십 년 동안 철저하게 분석한 한국 사회 제도 및 구조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결과다. 제도권 안에서 사회 기여를 최소화하면서 이익을 극대화한 노하우가 우리나라 경제를 갉아먹는 동시에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국민들의 다국적 기업 반감이 커지고 있다. 조세 회피, 사회 기여 외면 등 기존의 비판을 넘어 소비자를 기만한 행태에 공분 대상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다국적 기업이 '공공의 적'이 된 원인으로 한국 법·제도의 허점과 이를 이용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노하우 축적을 들었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럼 우리나라 소비자가 피해를 봤지만 해당 기업은 교묘히 책임을 회피했다. 다국적 기업이 사회 공분을 사게 된 원인을 제도, 사회 구조, 국제정치 관점에서 분석했다.

◇외국 자본 개방, 모럴해저드 시작되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을 끌어오기 위해 '외국인투자촉진법'을 제정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투자하면 취득세, 등록세, 법인세 등 각종 세제를 감면 또는 면제하는 조세특례제도를 시행했다. 이후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등록된 회사만 5만개가 넘어섰다.

다국적 기업의 한국 시장 진출이 본격화됐다. 애플코리아(1998년 11월), 구글코리아(2004년 3월) 등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의 진출도 러시를 이뤘다. 문제는 세계 각국에서 조세 회피 노하우를 축적한 다국적 기업이 한국 시장에서도 같은 방식을 적용했다는 점이다. 외국 자본 유입의 절실함, 제도상의 허점이 가득한 한국 시장은 그들에게 수익성 증대에 안성맞춤이었다. 반대로 국내 기업에는 역차별 문제가 불거졌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현재 다국적 기업을 둘러싼 문제의 시작은 DJ정부 시절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면서부터”라면서 “조세 회피 노하우를 축적한 다국적 기업은 유한회사 형태로 한국 시장에 들어와 20여년 동안 사회 책임은 외면한 채 수익성 증대에만 집중했다”고 꼬집었다.

◇베일에 싸인 그들, 정보 암흑지대

다국적 기업이 조세 회피, 사회 책임 외면 등 비판에도 꿋꿋한 것은 명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외부감사법에 따르면 비상장 유한회사는 회계 감사, 공시 의무가 없다. 재무 성과, 주요 주주, 법인세 부담액, 배당액, 사내 유보 등 주요 항목의 확인이 불가능하다. 2011년 상법개정안에 따라 사원 수 50명 이하, 1000만원 이상 최저 자본금, 지분 양도 제한 등 유한회사 규제가 없어졌다. 주식회사로 운영하던 외국계 기업도 대거 유한회사로 전환했다.

금융위원회와 국세청에 따르면 2005년 1만2091개이던 유한회사는 2015년 말 기준 2만6858개다. 10년 사이 122.1% 증가했다. 루이비통코리아, 구찌코리아, 에르메스코리아 등 명품업체를 포함해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코리아, 구글코리아, 페이스북코리아, 한국오라클 등 ICT 기업 대부분도 유한회사다.

유한회사로 사업을 영위하는 다국적 기업에 대한 시장 감시는 불가능하다. 경영 성과가 공시되지 않으면 시장 점유율, 법인세 납부, 고용 등 현황을 살펴볼 수 없다. 국내 시장 기여와 사회 책임에 자유로워진다. 본사로 송금하는 이익도 파악이 어렵다. 배당금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해외로 고스란히 송금한다. 유한회사 가운데에서도 다국적 기업의 배당금이 가장 높다. 금융감독원의 '외국인투자유한회사의 배당 성향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주식회사, 유한회사 4만4087개 기업의 배당 성향을 조사한 결과 외국인투자유한회사가 가장 높은 배당 성향을 보였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일으킨 옥시레킷벤키저도 2011년 유한회사로 전환했다. 전환 전 2010년 기준 당기순이익은 175억원이다. 반면에 중간배당액은 270억원이었으며, 당기순이익 150%를 본사로 송금했다.

◇이중과세방지·고정사업장 허점 노려

법률 전문가는 현재 다국적 기업 대부분이 국내에서 거둔 수익에 대한 세금을 제대로 내고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간 조세 협약, 개별국 조세법에 근거하면 '회피'는 있을 수 있어도 '탈세'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구태언 테크앤로 대표 변호사는 “다국적 기업 대상의 막연한 탈세 비판은 문제가 있다”면서 “글로벌 조세 협약 등 허점을 노려 세금을 회피하는 게 근본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가 간 조세 협약의 근간은 이중 과세를 금지한다. 한 국가에서 세금을 냈으면 다른 국가에서 추가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세금 납부 주체 산정 근거 역시 해당 국가에 고정사업장을 보유하고 있느냐 유무다. 다국적 기업이 우리나라에서 거둔 수익에 따라 세금을 냈거나 고정사업장을 보유하지 않으면 별도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ICT 산업 기준으로 우리나라 시장 규모는 세계 시장 1%가 채 안 된다. 다국적 기업의 한국 지사 매출이 크지 않다. 현지 생산도 거의 없어 대부분 본사에서 상품을 공급 받아 유통하는 방식이다. 라이선스 비용 등 최대 80%에 이르는 공급비용을 본사로 송금하고, 나머지 이익에 대한 세금만 내면 된다. 모든 수익은 아일랜드 등 세율이 낮은 국가에 송금, 이익을 극대화한다.

고정사업장을 내지 않는 것도 조세 회피 수단이다. 기존의 OECD 모델 조세 조약은 고정사업장 판단 기준으로 '계약 체결 권한을 갖고, 이를 항시 행사하는 곳'으로 명시했다. 기업에 속하는 재화, 상품 보관, 전시, 인도만 위한 시설이나 상품 재고를 보유하지 않는다면 고정사업장이 아니다. 기업을 위한 다국적 기업은 해외 지사 운영을 고정사업장이 없는 판매 대행, 마케팅 역할에 국한했다. 고정사업장이 없다는 논리다.

ICT 기업에 고정사업장 조항은 악용하기 좋은 도구다. 디지털 경제 시대가 오면서 실물 형태의 상품이 아닌 소프트웨어(SW) 솔루션이나 서비스 판매가 확대된다. 구글 등 다국적 기업이 해마다 막대한 매출을 올리는 앱스토어도 본사가 운영 주체다. 국내 고정사업장을 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조세 대상도 아니다. 2007년 블룸버그코리아는 서울 종로세무서를 상대로 법인세와 부가가치세 등 부과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 법원은 고정사업장이 없는데 법인세와 부가가치세 부과는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구 대표 변호사는 “국내 해외법인 대다수가 책임과 권한이 없는 마케팅 오피스”라면서 “애플 역시 통신사나 앱스토어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서비스도 외주를 주다 보니 고정사업장을 둘 필요가 없다. 이런 부분을 법리로 잘 이용, 일종의 '세-테크'를 구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복잡한 국제정치 환경, 우리만 치고 나가기 어려워

다국적 기업 문제는 오래 전부터 지적됐다. 문제점을 파악했기 때문에 해결책도 제시된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외감법을 개정, 올 11월부터 유한회사도 사업 연도마다 이사회, 감사, 주주총회에 보고해야 한다. 현재 시행령을 마련하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외국인투자촉진법 문제를 인지, 개선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유럽연합(EU), OECD는 다국적 기업 세원 잠식과 소득 이전 행위(BEPS)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조세 협약 개정을 통해 조세 회피 행위 근절에 나섰다.

문제의 원인을 알고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조세 문제가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혔기 때문이다. 조세 협약 개정을 위해서는 각국 의회의 비준이 필요하다. 이중 과세 방지라는 큰 틀에서 특정 국가가 조세 부과권을 행사할 경우 다른 나라의 반발이 예상된다. 우리나라가 주도할 경우 자칫 국가 간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구 대표 변호사는 “조세 문제는 기업과 국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 간 문제일 수도 있다”면서 “구글에 강력한 조세 잣대를 들이댈 경우 삼성전자가 비슷한 상황으로 피해를 볼 수 있어 우리가 주도하기보다 선진국과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안호천차장(팀장),유선일·최호·권동준·정용철·오대석·최재필·이영호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