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발자취들이 있다. 전자산업 40년, 그 역사의 현장과 함께 불멸의 이름으로 남게 된 사람들은 누구일까.
1959년 국산 최초의 진공관 라디오 「A-501」이 전자산업의 태동을 알렸다. 이 기념비적 라디오와 더불어 전자산업 40년사의 첫 장에 수록될 만한 인물은 구인회 금성사 창업회장(작고). 구 회장은 일제시대인 31년 여름, 동생 구철회씨와 함께 경남 진주 시내에서 「구인회 상회」를 열었다. 2층짜리 목조건물에서 출발한 이 작은 상점을 밑거름으로 58년 금성사(현 LG전자)가 설립됐고, 창업 1년 만에 국산 전자제품 1호가 세상의 빛을 본 것.
구 회장은 이 라디오 때문에 한동안 궁지에 몰렸다. 처음에 2만환이라는 가격표를 달고 서울 미도파 백화점에 진열됐던 A-501을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부산의 미군 PX에서 매달 쏟아내는 1만2천대의 라디오 물량공세에 밀렸던 것. 덕분에 재고만 3천대가 쌓여 하마터면 금성사는 문을 닫을 뻔했다. 하지만 실패작으로 끝날 뻔한 이 제품은 61년 군사정부가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기사회생, 나중엔 품귀현상을 빚을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결국 금성사는 62대의 라디오를 미국에 수출하는 개가를 올렸는데, 그때 국산 전자제품의 첫 선적을 흐뭇하게 지켜봤던 사람은 관리부장 구자두씨(현 LG유통 고문)였다.
그렇다면 A-501의 개발자는 어떤 사람일까.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이 탁상형 5극 진공관 라디오를 만든 이는 당시 금성사 설계 주임이었던 김해수씨. 하지만 아쉽게도 그에 대한 자세한 신상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출발했던 라디오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 뒤이어 흑백TV와 콘덴서·저항기·IC·브라운관도 가세했다. 이 5가지 품목은 60∼70년대 전자산업 수출의 든든한 대들보가 됐다. 이처럼 가전제품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가 바로 상공부 이만희 전기공업과장(현 세호 회장).
그는 전자제품이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해외시장의 문도 열어줄 것이라는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다. 66년 이만희씨는 처음으로 가전을 상공부 업무에 포함시켰고, 이는 전자공업에 대한 최초의 산업적 접근인 셈이었다. 그는 「전자」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이기도 했다. 전기공업과장으로 일하면서 부하직원인 계장으로부터 뺨을 맞았던 사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라고 이씨는 그때 그 시절을 회고한다.
『60년대 중반의 일이었죠. 우리 국민의 손재주와 학문에 대한 열정, 그리고 기후조건을 고려할 때 전자산업의 미래는 밝다고 판단했습니다. 우선 TV부터 국산화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필립스 TV를 견본품으로 들여오려고 수입 실무부서인 상역국 상경과로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뺨을 맞았죠. 저를 동명이인의 영화인인 줄 알았던 그 친구가 시나리오나 쓰지 왜 정부부처에 찾아와 설치냐면서 순간적으로 뺨을 때리는 실수를 저지른 겁니다. 한동안 상공부 직원들은 「뺨 한대로 TV 국산화가 시작됐다」는 농을 했죠.』
60년대 가전제품 수출에 공로가 컸던 또다른 인사는 박충훈 전 상공부 장관(현 산업개발연구원 회장).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전선의 총사령관이었다면 박 장관은 참모장격이었다. 64년 상공부 장관에 오른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수출을 독려했고, 전자공업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67년 내한해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에게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건의서」를 제출했던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김완희 박사 역시 우리 정부의 전자산업 육성을 위한 방향모색에 일조한 인물이었다.
60∼70년대 중반 활약했던 재계 인사로는 누가 있을까. 67년 한국전공업협동조합 창립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이 대부분 전자산업의 터를 닦아낸 주역들. 최초의 전자부품 콘덴서업체로 기록된 삼화전기의 오동선 사장을 비롯, 트랜지스터 라디오 및 TV부품을 생산했던 서봉희 한국마벨 사장과 김성택 오리온전자공업 사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 또 수동진동자의 곽명호 싸니전기공업, 볼륨컨트롤의 동아전자공업 최진수 사장, 전자공업시찰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던 김기억 우신화학산업 사장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
가전을 중심으로 전자산업이 틀을 갖추는 데 상공부의 측면지원이 주효했다면 컴퓨터를 축으로 과학기술 발전의 힘찬 톱니바퀴를 돌렸던 곳은 과기처(현 과기부). 과학기술 관련 행정기구와 연구기관을 통합해 67년 4월 출범한 과기처의 김기형 초대장관도 전자산업 발달사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가 취임하던 해 경제기획원 통계국에서는 인구센서스를 위해 「IBM 1401」을 도입했다. 이 최초의 컴퓨터 가동식에는 김기형 장관도 모습을 드러냈다. 김 장관은 그 후 국민계몽과 소프트웨어 수출을 포함한 「전자계산기 사용개발 7개년 계획」을 발표, 컴퓨터산업 육성의 기본골격을 세웠다.
당시 IBM 1401 도입을 지시했던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작고)도 초창기 컴퓨터역사와 함께 기억될 만한 인물. 김 차관은 해외출장중 미 연방정부가 이 첨단장비를 사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고 돌아와 이같은 지시를 내렸다.
알고 보면 67년은 한국 전자산업 발달사에 한 획을 긋는 해였다. 최초의 컴퓨터 도입과 과기처의 출범에 이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자계산실이 발족했던 것. 이 시점에서 우리는 또 두사람의 선각자와 만나게 된다.
과학기술개발의 산실 KIST의 초대소장을 지낸 최형섭(현 과총 회장). 그는 과학기술 연구기관의 설립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물급 인사였다. KIST의 설립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71년부터 78년까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정부출연연구소와 교육기관을 통폐합, 과학기술 연구의 메카 대덕단지 조성에도 핵심역할을 했다.
또 한 사람의 선각자는 우리나라 전산실과 소프트웨어센터의 효시, KIST 전자계산실을 이끌었던 성기수 박사(현 엘렉스컴퓨터 고문). 그는 KIST로 스카우트될 당시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고 막 돌아온 34세의 전도유망한 공군사관학교 항공역학교관(대위)이었다. 이 젊은 과학자는 정부의 예산업무처리부터 70년대 전화요금 전산화, 대학 예비고사 전산처리, 경영정보시스템 모델연구에 이르기까지 주요 전산시스템 개발을 진두지휘하면서 KIST와 근 30년을 함께 했다.
초창기 컴퓨터 산업발달에 헌신한 엔지니어로는 KIST의 굵직굵직한 프로젝트 실무를 맡았던 안문석(고려대 교수)을 비롯, 김봉일 한국통신 통합시스템개발단장, 신동필 전 시스템공학연구소 소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최초의 국산 미니컴퓨터 개발주역이었던 안병성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컴퓨터공학부 실장(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미국 데이터제너럴사의 노바01을 개량해 73년 2월 세종1호를 내놓았다.
그렇다면 학계의 거목은 또 어떤 이들이었을까. 우선 컴퓨터 관련학과 1호였던 숭실대 전자계산학과 개설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김기룡 교수를 비롯, 숭실대 송후봉, 중앙대 이태원, 동국대 안사명, 서울대의 김영택과 안수길, 연세대 한만춘과 박규태, 고려대의 서남원과 송길영, 광운공대 김경태, 한양대 김경기, 한국과학원 박찬모와 조정완 교수 등이 컴퓨터관련 인재배출을 위해 헌신한 교수들.
삼성전자·금성사·대한전선의 삼각구도로 가전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했던 70년대 말, 이제 막 발화하기 시작했던 컴퓨터업계를 책임진 이들은 누구였을까.
초창기 컴퓨터업계는 IBM 등 외국계 현지법인, 동양전산기술(OCE)을 비롯한 외국컴퓨터 유통업체, 그리고 한국전자계산(KCC)으로 대표되는 소프트웨어 용역개발회사 등 세 갈래로 나뉘었다.
이같은 밑그림 위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업체는 미니컴퓨터 오리콤540을 조립했던 OCE. 당시 OCE는 20∼30대 사원을 주축으로 화려한 인맥을 형성했다. 이윤기 전 삼보컴퓨터 및 엘렉스컴퓨터 대표, 권순덕 한맥소프트웨어 대표, 김영식 엘렉스컴퓨터 대표, 김병각 전 두산정보통신 사장, 김주현 전 삼성전관 전무 등이 모두 OCE 출신.
초록 바탕에 노란색 원, 그 안에 돋아난 세잎의 녹색 새싹으로 상징되는 새마을운동의 깃발이 힘차게 나부꼈던 70년대를 지나 대망의 80년대가 밝아오자 전자산업의 화두는 가전제품에서 PC와 소프트웨어로 완전히 넘어갔다.
지금은 도산한 한화 계열 고려시스템산업이 최초의 상용 워드프로세서 「명필」을 내놓았던 83년, 정부는 정보산업의 해를 선포했다.
체신부가 전면에 나서 전자산업을 주도했던 80년대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는 오명 전 체신부 장관(현 동아일보 사장)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무려 8년간 체신부 장·차관으로 재임하면서 정보사회의 기반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오 사장은 차관 재직시절이던 81년 10월 체신부 전기통신조직 부문을 한국전기통신공사(KTA·현 한국통신)라는 법인체로 공사화시키고 82년 3월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을 출범시킨 산파역이기도 했다. 만성적 전화적체 해소, TDX 개발사업의 지원, 각종 정보통신 관련법 제정 등이 모두 그의 재직시절 이루어졌다.
70년대 중반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 ETRI의 전신) 부소장으로 마이크로컴퓨터 「HAN-8」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82년 한국데이타통신 초대 사장으로 부임한 이용태(현 삼보컴퓨터 명예회장)도 컴퓨터와 통신의 만남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인사.
한국전자통신연구소 행정전산망 주전산기 개발본부장이었던 오길록 박사(현 전자통신연구원 컴퓨터소프트웨어기술연구소장)와 TDX개발단장을 맡았던 양승택 박사(현 한국정보통신대학원 총장)도 80년대 기술개발의 주역이었다.
한편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로 이어지면서 첨단기술 개발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통신산업의 초석을 닦은 광통신 및 전전자교환기 개발, 전세계인의 눈이 쏠렸던 서울올림픽의 주전산망 개발은 온국민을 들뜨게 하기 충분했다.
또 PC산업의 원조격인 청계천 전자상가의 8비트 컴퓨터 복제기술,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 개발과 바이러스 백신프로그램 개발, 국산 행정전산망 주전산기 타이콤 개발 등도 한국 컴퓨터 발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일들.
이 시기에 컴퓨터업계를 끌어간 업체는 82년 9인치 모니터와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를 가진 「SE-8001」 상업화에 성공했던 삼보전자(현 삼보컴퓨터), 그리고 뒤이어 뛰어든 삼성전자, 금성사(현 LG전자), 대우전자가 있다. 삼성전자의 초대 컴퓨터시스템부장 전인수를 비롯, 영업과장 김영한(하이테크컨설팅 소장), 지원과장 임득순(한국HP 상무), 금성사의 사업부장 심흥주(전 금성알프스전자 사장), 컴퓨터본부장 김대규(BT코리아 사장) 등이 당시 활약했던 인물들.
한국을 오늘날 세계적인 반도체 대국으로 키워낸 메모리맨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특히 87년 삼성에 합류해 4MD램 개발을 진두지휘한 후 메모리산업의 간판스타로 떠오른 진대제 삼성전자 부사장을 비롯,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반도체업계의 대부로 불리는 전자산업진흥회 강진구 전 회장, LG반도체를 키워낸 문정환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 회장과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 그리고 현대전자의 오계환 부사장도 반도체업계를 빛낸 걸출한 인물들.
인터넷과 이동통신이 키워드가 된 90년대. 청와대 경제비서관 출신의 정보통신부 정홍식 차관, KTA 품질보증단장과 TDX10 전전자교환기 사업단장을 거쳐 과기처 차관으로 일했던 서정욱 SK텔레콤 사장 등도 9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사람들.
이제 21세기를 앞두고 중책을 맡게 될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삼성SDS 시절부터 사이버 스페이스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바쁘게 뛰어야 할 대표적 인사.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벤처업체 사장들 또한 정보통신 선진국을 향한 선봉에 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벤처군단을 이끄는 단장격인 이민화 벤처협회 회장과 정문술 미래산업 사장을 비롯, 국산 바이러스로 외길을 걸어온 안철수 안연구소 소장, 아래아한글 워드프로세서의 버팀목인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공동대표 등 수많은 젊은 기업가들이 21세기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이선기기자 sk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