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철학이 없는 벤처

주종철 K4M사장 zczhoo@k4m.com

최근 모 방송국이 창사기념으로 「기(氣)의 대탐험」을 제작·방영한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며 가장 인상깊었던 부문은 생명 에너지로서의 기에 대해 과학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하고 생활 속 원리로 실천하는 「서양인」들의 모습이었다. 단지 손끝으로 담배나 쓰러뜨리는 묘기 수준으로 전락한 「한국」의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점들은 진지함의 결여, 즉 철학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다. 정치 파행, 의약분업 파동, 한국 축구의 추락, 벤처기업인과 정치인의 야합 등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각각 정치인·의료인·축구인·기업인으로서 진지함과 철학이 결여됐기 때문이 아닐까.

정보기술(IT) 분야도 마찬가지다. 외국의 IT업체와 비교할 때 국내 IT업체들이 미흡한 부문은 기술인력·자금력·마케팅 파워 등 외형적인 요소들이지만 그 못잖게 진지함과 철학의 결여라는 점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그 시대 사회·문화적인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인터넷·B2B 같은 「거시 기술」에서부터 자바·확장성표시언어(XML) 같은 기반 기술까지 철학적 기반 위에 설계되고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업체들은 B2B와 노동의 종말을, 자바와 자유민주주의의 연관성을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기술을 개발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외국에서 유행하니까 등의 이유로 기술에 접근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아닐까.

우리나라 IT업체들이 기술의 흐름을 선도하지 못하고 기술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그저 국제표준이라는 이유로 따라가기에만 급급한 것도 따지고 보면 진지한 성찰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장과 고객을 설득하는 힘은 결국 나의 기술이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더해줄 수 있는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을 때 나오는 것이다. 시대와 시장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기술은 단지 시장과 고객을 일시적으로 현혹해 자그마한 돈벌이만 가능하게 할 뿐이다.

벤처기업 열풍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만 있으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과 시장 그리고 고객에 대한 진지함과 철학을 갖는 일이다. 그 토양 위에서 더 좋은 아이디어와 더 많은 열정, 정직한 기업문화가 자라날 수 있고 고객가치 증대와 사업의 성공이라는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벤처기업이란 아이디어 하나로 일확천금을 벌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기존 질서체계에서는 구체화하기 힘든 자신들의 기술과 철학을 진지한 열정을 통해 이뤄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한다.

기존 기업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과 진지함 또한 기존 기업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가치를 가진 집단이 바로 벤처라는 인식을 사회적으로 확립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 벤처기업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하루 이틀, 아니 1, 2년 만에 가능한 일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사명이라 표현한 것이다.

벤처기업들 스스로 진지함과 철학이 밑바탕이 된 기업 활동을 통해 가치있는 벤처문화의 전형을 창출해 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할 때 그 밑거름 위에서 진정한 사업적 성공과 사회적 명망이라는 꽃을 피울 벤처기업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난 IMF 시절보다 더 추운 겨울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경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국내외 경제·사회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지금의 한국 경제의 현실은 진지함없이 우왕좌왕하던 철학없는 한국 경제의 위기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또 한번 금을 모으자는 즉자적인 열성이 아니라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나와 세상에 대한 진지함과 성찰을 복원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