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디지털로 대표되는 정보기술(IT)이 우리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성장엔진으로 급부상했다. 아니 IT가 침체된 우리 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처럼 각인됐다. IMF 이후 국내 경제 전반에 퍼져나갔던 IT에 대한 이같은 절대적 믿음은 허상일 수 있다는 분석이 산업계 일각에서 일고 있다. 이는 닷컴·벤처가 마치 IT의 전체인냥 호도되고 맹목적이던 IT열풍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IT를 재조명해보자는 분위기와 일맥 상통한다.
이같은 기류는 지난 3년간 IT 광풍에 치여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 전자부품업계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 닷컴 기업이 국부를 창출할 수 있는 수출산업화하기에는 아직 힘들다는 게 검증되면서 전자부품업계의 목소리는 더욱 힘을 받고 있다. 전통산업내지 굴뚝산업으로 치부돼 IT의 엑스트라 역을 해온 전자부품업계가 IT를 다시봐야 한다는 목소리에 편승, IT의 주연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배경은 무엇인가.
바로 수출이다. 올해 국내 IT 수출은 전반적인 세계 경기 위축으로 지난해에 비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IT의 선두주자로 각광받아온 인터넷·닷컴·소프트웨어 부문의 수출 실적은 극히 미미한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반면 전자부품은 비록 지난해보다는 다소 줄었으나 나름대로 국내 IT의 수출 버팀목 역할을 해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같은 자신감이 주연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보태주고 있다. 즉 고작해야 2억달러 남짓한 수출 실적을 기록하는 SW산업과 73억달러의 수출을 기록하는 전자부품 중 누가 국부에 기여하고 IT산업 발전에 성장엔진 역할을 하느냐는 게 전자부품업계의 응어리진 목소리다.
전자부품업계의 목소리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세트업체로 향하고 있다.
모바일 정보통신시대에 힘입어 올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휴대폰의 수출도 기실 내용을 뜯어보면 별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올해 휴대폰 수출 실적은 지난해보다 30% 정도 늘어난 72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올해 반도체를 제외한 국내 전자부품 전체 수출액과 맞먹는 규모다. 그러나 국산 휴대폰의 부품 국산화율이 53%에 머물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수출을 통한 부가가치는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PC·DVD·디지털카메라·디지털 TV 등 유망 수출 품목에서도 사정은 엇비슷하다. 1500개 부품이 들어가는 고성능PC도 CPU를 비롯해 동영상 보드까지 부품의 절반 이상이 수입품이며 DVD플레이어는 70%의 부품을 수입에 의존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출이 늘어날수록 핵심부품의 수입도 덩달아 늘어나게 돼 있다. 수입유발형 국내 전자산업 속살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수출이 늘어나면 여기에 장착되는 핵심 전자부품의 수입도 더불어 늘어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비로소 국내 전자산업 나아가 IT산업이 자립형 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즉 세트업체들이 적극적인 부품 국산화를 유도하고 국산 부품을 사용하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게 부품업계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이에 대해 세트업체들은 “모든 품목을 국산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또 핵심부품은 국산화가 미흡, 어쩔 수 없이 외산을 쓸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나아가 글로벌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국산을 고집하기보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품질 좋고 가격이 싼 부품이면 국적을 가리지 않는 게 오늘날의 경영 환경이라면서 국내 부품업체들은 아직까지 내수중심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고 세트업체들은 지적하고 있다. 전자부품업계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며 우려하는 현실이다.
우려는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동안 전통·범용 국산 부품을 사용해온 세트업체들이 올들어 구매선을 중국·동남아 등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이 세계의 전자공장으로 급부상하면서 국내 주요 세트업체들은 중국에 현지 공장을 경쟁적으로 건설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내에서 구매하던 부품마저 현지 조달할 계획을 갖고 있다. 가격이 중국보다 높고 납기에 지장이 있는 국산 부품을 사용하기보다는 중국 현지업체의 부품을 구매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게 세트업체의 주장이다.
여기에다 국내 전자부품업계의 주요 거래처이던 외국 세트업체마저 중국에 공장을 건설하고 구매처를 중국·동남아 등으로 돌리고 있다. 국내 전자부품산업이 사면초가에 빠져드는 국면이다.
이같은 구조적 문제에 봉착해 있는 전자부품산업을 되살려 국제 경쟁력을 지닌 수출 선도산업으로 자리매김되도록 하려면 우선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디스플레이 등 일부 선발 품목의 경우 세계 시장지배력을 높일 수 있도록 과감한 설비투자가 선행돼야 하고 광부품·고주파부품 등 시장형성 초기의 고부가 미래형 핵심부품은 세계적 제품을 목표로 정부 주도로 집중적으로 선행개발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국내 전자부품 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국제 경쟁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부품 전문기업을 육성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김춘호 전자부품연구원장은 주장하고 있다. 글로벌 무한 경쟁시대에서 1위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현실을 감안,세계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설비 투자력과 기술력을 지닌 부품 전문 기업을 골라 정부가 의지를 갖고 밀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국제 경쟁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중소 전자부품업계가 새로운 활로를 찾도록 세트업체와의 동반 해외진출·사업 다각화 부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금상첨화다. 물론 전자부품업계의 뼈를 깎는 자구노력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는 전제에서다.
나아가 차제에 전자부품 산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전자부품업계는 주장하고 있다. 인터넷·닷커기업만이 벤처가 아니라 차세대 정보통신기기용 부품을 개발, 생산하려는 부품업체도 벤처이며 이들이 국내 IT산업의 토대를 공공히 하는 초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IT산업의 진정한 경쟁력은 부품이라는 핵심역량을 강화하는데서 부터 출발한다.
<이희영기자 h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