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77)화가 모스(상)

 1844년 5월 1일. 미국 볼티모어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미국의 정당대회는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뽑는 매우 중요한 정치행사로, 온 미국인의 눈과 귀가 볼티모어에 쏠려있었다.

 그날 워싱턴 우정국의 한 사무실에서 키가 훤칠하고 눈이 움푹 들어간, 깡마른 모습의 사내가 무겁고 커다란 코일과 원시적인 배터리로 된 전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볼티모어에서 열리는 전당대회의 소식을 알려줄 전신기가 작동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는 한창 전신선이 가설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중간에 있는 도시 애너폴리스까지만 가설되어 있었다. 그 사내는 공화당 전당대회 소식을 애너폴리스의 역에서 전달받아 전신기를 통해 워싱턴으로 보내도록 그의 부하직원에게 지시를 하고 그 내용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중이었다.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 설치되는 전신선은 우여곡절 끝에 미국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1844년 4월 1일 워싱턴에서부터 설치공사가 시작되었다. 전선가설 공사는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지상 24피트 높이의 전신주를 200피트마다 세우고 그 위에 구리선을 매다는 방식이었다.

늦은 오후. 책상 위에 놓여있던 전신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사내는 아주 천천히 풀려나오는 종이 테이프를 응시했다. 종이 테이프는 멈추다 나오고, 나오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불규칙적으로 부호를 표시하고 있었다. 부호가 찍힌 종이 테이프를 자세히 살펴보던 그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전당대회는 끝났습니다. 볼티모어에서 온 워싱턴행 기차가 그 소식을 가지고 지금 막 애너폴리스를 떠났습니다. 제 부하 직원이 전당대회에서 지명된 후보의 이름을 지금 막 보냈습니다. 대통령에 헨리 클레이, 부통령에는 시어도어 프렝링라이젠이 지명됐습니다.”

 그 사내는 이 뉴스가 실린 종이 테이프를 주변 사람들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 읽을 수 없는 부호였고, 아직 열차가 도착하지 않아 그 뉴스가 사실임을 확신하지 못한 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드디어 열차가 도착하고, 그 사내의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지면서 전신은 하나의 충격으로 세상에 전해졌다. 전신이 공식적으로 개통되기 전의 일이지만 통신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강력하게 세상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난 뒤 신문에서는 커다란 글씨로 관련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어 있었다.

 “공간이 소멸되는 기적이 먼 거리를 두고 일어났다.”

 1844년 5월 24일.

 미국 국회의사당 1층 대심원실. 실내는 우아한 아치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고, 새로 홈이 파인 기둥이 높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워싱턴-볼티모어 사이 64㎞의 전신선 개통을 축하하는 행사로, 많은 저명인사들이 초청되었다. 그 자리에는 대통령 후보 헨리 클레이도 참석했다.

 드디어 행사가 시작되었다. 전신선을 통해 전해지는 공식적인 첫 문장은 어린 숙녀에게 그 선택권이 주어졌다. 애니 엘즈워즈양이었다. 그 숙녀의 글은 점과 선으로 조합된 모스 부호로 바뀌어 전신선을 타고 볼티모어로 보내졌다. 잠시 후 워싱턴 행사장에서 보낸 내용을 수신한 볼티모어에서 다시 같은 내용을 워싱턴으로 보냈다.

 ‘하느님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셨는가?(What hath God wrought?)’

 성공이었다. 환호와 함께 행사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당시 나이 53세인 사내로, 공화당 전당대회의 소식을 기적처럼 알려준 바로 그 사내였다.

 그 사내는 계속해서 볼티모어에 있는 자신의 부하직원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뉴스·시간·날씨 등에 관해 전신기를 통한 대화가 이뤄졌다. 참석한 손님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게 된 그 사내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새뮤얼 모스(1791∼1872)였다.

 모스는 1791년 4월 27일, 지금은 보스턴에 속하는 매사추세츠 찰스타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러미아 모스는 교회의 목사였고 미국 최초의 지리학 책을 쓴 사람이다. 그가 쓴 지리학 교과서는 노아의 홍수를 강력하게 옹호, 노아의 방주 안에 과연 어떻게 모든 동물을 실을 수 있었는지를 학문적으로 논하는 등 성경적 관점으로 일관하고 있고, 성경적 연대기를 그대로 지구역사에 도입하고 있다.

 모스는 그러한 아버지와 가정의 영향을 받아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랐고, 철저한 창조론을 믿는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훗날 전신기를 개발하기까지 고난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주위의 냉대를 겪으면서도 그 신앙을 의지하였으며, 사업이 성공한 후에는 선교사업과 성직자 양성기관을 후원하기도 했다.

 모스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대단한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실제로 그의 81년 생애 가운데 41년을 미술에 바쳤다. 전신발명이 너무 두드러져서 화가로서의 활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모스가 그림에 바친 세월만큼 그는 당대의 위대한 화가였으며, 조각가로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인 모스의 이런 예술적 취향을 반기지는 않았으나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어 마침내 그를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모스의 나이 20세 되던 1811년이었다. 모스의 예술적 재능은 영국 유학에서 개화하기 시작했고 대중적 명성도 얻게 되었다. ‘헤라클레스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이름난 조각전에 출품해 특선을 차지한 것도 이때였다.

 그가 제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의 초상화와 프랑스 태생으로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라파예트 장군의 초상을 그린 것이나, 25세 되던 1815년 국립미술관의 초대관장을 역임한 것에서도 그의 예술적 재능과 화가로서의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어쩌면 그런 예술적 재능이 고도의 과학적 재능으로 전이되어 위대한 발명에 이르렀던 것일 수도 있다.

 모스는 영국 유학중 늦은 통신 때문에 빚어진 피해를 심각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그가 1811년 미술학도로 영국에 도착했을 때, 영국과 미국 사이에는 전쟁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다. 이때 영국의 군함이 영국과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로 물건을 운반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미국의 배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영국은 미국측에 화해를 요청하려고 했지만 그 메시지가 대서양을 건너가는 데 한달이나 걸렸기 때문에 미국은 1812년에 전쟁을 선포하고 치열한 전쟁을 치러 많은 인명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2년 후에 그와 유사한 혼돈 속에서 끝났다. 평화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미국과 영국의 많은 군대는 그 전쟁이 끝났는지도 모르고 치열한 전투를 계속 벌였다. 모스는 좀 더 신속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스는 영국의 예일대학에서 미술공부에 전념하면서도 전기학 등을 수강했다. 전기적 특성을 통해 통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그것을 현실화시키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