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캠퍼스로 불리는 LG전자 평택공장의 한켠에 있는 조그마한 사무실에는 마냥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 만면에 미소를 짓고 앉아 있다. 그의 앞에는 손이 베일 것만같이 날카롭게 날이 선, 잘 다려진 양복을 말쑥히 차려입은 일본 신사가 보고서를 앞에 두고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 히타치제작소와 LG전자가 합작해 만든 HLDS(Hitachi-LG Data Storage) 사무실 풍경이다.
박문화 사장(52)을 처음보는 사람은 그가 세계 광스토리지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세계 1위 제조기’라는 별명을 상상하기 힘들다. 소탈한 성격과 털털한 외모 때문에 그냥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로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합작회사의 성공사례를 만들어 고객과 사원과 주주에게 최상의 만족을 주는 ‘최우수 글로벌기업(Global Excellent Company)’을 만드는 게 저의 임무이자 소신입니다. 이를 위해 늘 ‘혁신’이란 단어를 머리 속에 담고 삽니다.”
세계 최대 광스토리지업체인 HLDS의 초대 사장인 동시에 한국에서 몇 안되는 다국적기업 CEO인 박문화 사장(52)의 첫마디다.
소박한 첫인상과 달리 그의 이력은 화려 그 자체다. 75년 LG전자에 입사해 음향설계실 근무를 시작으로 하이파이 OBU장을 지낸 94년 초까지 17년간 오디오분야에만 몸담았을 정도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오디오 전문가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명성은 94년 CD롬 OBU장을 맡고 부터다.
그가 이 사업을 맡은 지 4년 만인 98년에 CD롬 분야에서 LG전자는 세계 최대업체로 등극했다.
이어 2000년에는 CDRW에서도 세계시장 점유율을 23%로 끌어올려 이부문 최고 강자인 소니(21%)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2001년에는 히타치제작소와의 합작을 통해 DVD롬마저 장악했다.
2001년에는 전세계적인 IT불황과 함께 PC업계 또한 역사상 유례없는 침체를 경험했고 광 스토리지 시장도 전년도에 비해 성장이 완만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LDS는 광 스토리지 시장 점유율을 제휴 전 17%에서 2년 만에 24%로 높이며 세계 최대업체라는 입지를 확고히 했다.
사업 첫해인 지난해 16억달러 매출로 톱메이커가 되었고 올해에는 25%나 증가한 20억달러의 매출로 타의추종을 불허할 전망이다. 그는 생산을 아웃소싱하는, R&D와 마케팅만을 전문으로 하는 최초의 한일합작 기업 HLDS 사장이자 광스토리지계의 대부다. 그러나 신기록 제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매출성장보다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DVD제품에서 주도권을 잡게 된 것입니다. 작년 11월 라스베이거스 컴덱스에서 출시한 ‘슈퍼멀티 록형 DVD 드라이브’는 CD롬, CDRW, DVD롬, DVD램, DVD+RW, DVD-RW 등 여러가지를 모두 호환하여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제품입니다.”
여러가지 표준들이 경쟁을 하고 있는 이 시장에서 모두를 호환해서 쓸 수 있는 제품이 나온 것이다. 어떠한 것이 기술표준으로 자리잡을지 모르는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경쟁의 양상을 바꿀 수도 있는 획기적인 성과다.
“수퍼멀티의 출시는 히타치가 없었더라면 하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이쪽 시장이 다 그렇듯이 기술은 순간에 따라 잡힙니다. 기술을 어떻게 빨리 제품화해서 파느냐가 관건이지요. LG는 그런 분야에서는 선수급입니다. 한마디로 이번 슈퍼멀티는 HLDS라는 합작회사의 시너지 효과를 보여주는 첫 가시적 성과라고 저는 평가하고 싶습니다.”
“2000년 5월 당시 합작계약이 이루어진 후 숨가쁘게 이루어진 협상을 떠올리며 큰 일을 끝마쳤다는 안도감보다는 앞으로 어떠한 성과를 실현해낼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습니다.” 당시 LG전자 디지털스토리지사업부장으로 히타치제작소와 제휴를 이끌어낸 박 사장의 술회다.
“두 기업의 직원들이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잘 융합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고, 또한 LG전자 내외부에서조차 숱한 의문을 안고 시작한 제휴였기 때문에 더욱 막중한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평소 이웃집 아저씨 같은 털털한 인상에 항상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이지만 이 말을 할 때만은 팽팽한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합작 이후 그가 이룩한 놀라운 성과는 히타치의 연구개발력과 LG의 제조력 및 판매망을 합쳐 시너지를 창출한 이상적인 윈윈전략의 산물이다. 그러나 화려한 겉과는 달리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를 상호 신뢰로써 극복하고 양사의 핵심역량을 발전적으로 융합시킨 박 사장의 피와 땀이 배어있다.
“합작 초기 일본에 얼마간 머물면서 각 부서별, 계층별 간담회를 열고 히타치제작소 출신의 고위 간부들과 한국 경영진의 생각을 조율하는 데 진력했습니다. 히타치의 경우에는 한국기업과 한국 CEO를 못미더워 하는 면도 있었지요. 합작 초기에는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직 구성원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려는 박문화 사장의 노력은 몇가지 일화에서도 엿보인다. HLDS 창립축하 행사에서 박 사장은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히타치제작소 노조위원장에게 격의없는 관심을 보여주었다. 회식자리에서는 일본인 여직원들에게 장미꽃을 직접 전해 주어 여직원들의 인기를 한 몸에 사기도 했다고 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업체와의 합작과 한국인 사장을 맞게된 불안감으로 마음이 닫혀있던 노조원들이 회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박 사장은 아직까지도 매달 자세한 경영실적과 시장상황을 직접 전사원들에게 설명하며, 각 계층의 사원들과 호프집에서 맥주잔을 같이 하며 격의 없는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 주요한 일정 중 하나다.
HLDS의 조직은 독특하다. 일본인 직원들은 일본에, 한국인 직원들은 한국에서 근무한다. 본사는 일본에 있지만 한국에도 현지법인을 두고 있다. 본사 사장과 국내 현지법인 사장을 겸하고 있는 그는 일년의 절반을 양국에서 각각 보낸다.
“일부 LG전자 출신 직원들이 사장이 일본인들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 주어서 섭섭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공평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박 사장은 HLDS의 성공을 위해 하나의 조직과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주력했다.
“ HLDS는 기본적으로 조직구성원들에게 상호 신뢰와 소속감을 심어주어 하나의 기업문화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그후에 시간을 두고 각종 제도의 통합을 단계적으로 해 나가는 것을 통합의 방향으로 삼았습니다.”
우선 모든 팀을 일본 히타치제작소의 직원과 한국 LG전자 직원을 골고루 섞어서 구성했다. 또 양측의 연구개발인력을 교환하여 교차근무제도를 마련하였다. 경영진간에 회사운영 방향에 대해 동일한 의견을 공유하도록 계층별, 조직별 간담회를 가지기도 하고 팀장급 간부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마련하여 회사운영에 대한 상호의견을 공유하는 시간을 틈틈이 갖도록 하고 있다.
“워크숍을 진행하는 동안 영어 또는 일본어로, 모두가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서로의 의견을 잘 전달하려는 굳은 의지와 노력을 보이며 열띤 토론을 벌입니다. 그런 모습만으로도 HLDS의 미래에 대한 서로의 뜨거운 열정을 공유할 수 있는 거죠. 토론이 끝나면 체육행사도 가집니다. 국적도 지위도 잊은 채로 그라운드 위를 맘껏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한가족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광스토리지 산업의 특성상 조직의 신속한 의사결정은 성공의 필수적인 요소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지리적 거리를 극복하고자 일본 본사를 중심으로 미국, 한국의 현지 지사간에 통합메일솔루션을 구축, 해외에서도 자유롭게 메일 송수신을 통해 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자신을 비롯한 각 팀장들은 한 달에도 여러 차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한 일본 본사에서는 한국어, 한국 자회사에서는 일본어 교육과정을 설치하여 상호 의사소통을 하는데 언어의 문제점을 느끼지 않도록 돕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씩 사내 웹진을 만들어 일본 본사와 한국 자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매달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재는 컨설팅사에 의뢰해 인사제도를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정보시스템 통합을 위한 청사진을 완료했습니다. 첫해인 2001년이 상호 조직구성원 간에 신뢰를 쌓고 동일한 기업화로 이끄는 시기였다면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가시적인 시스템 통합의 시기입니다. 3년차인 2003년은 이를 바탕으로 혁신을 일궈내는 해로 삼고 있습니다.”
<유성호기자 shyu@etnews.co.kr>
△72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75년 음향설계실 입사 △81년 오디오설계실장 △91년 오디오공장장 △92년 하이파이 OBU장 △94년 CD롬 OBU장(이사대우) △98년 광스토리지 OBU장(상무) △99년 LG전자 광스토리지 OBU장(전무) △2000년 LG전자 디지털스토리지 사업부장(부사장), 런던 비즈니스스쿨 경영자과정 수료 △2001년 HLDS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