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쿵푸 허슬’에서 주인공 싱(주성치)은 어린 시절 장사꾼에게서 구입한 여래신장이라는 비급을 진짜로 믿고 열심히 수련한다. 그때 수련한 기운은 주성치의 몸에 간직되어 있다 나중에 계기를 만나서야 밖으로 드러나 합마공을 익힌 살인왕 야수(양소룡)를 눌러 버린다.
필자는 이 영화를 무협문화에 대한 주성치의 오마쥬로 읽었다. 여래신장이란 중국 무협영화의 대부라 할 수 있는 호금전의 유명한 영화 제목이다. 야수가 펼치는 합마공의 합마란 두꺼비를 뜻하는데 신필 김용의 사조영웅전(한국에는 영웅문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에 등장하는 서독 구양봉의 비전절기다.
영화 마지막에 다시 만난 비급 장사꾼이 내미는 책들의 제목을 자세히 보라. 하나같이 중국의 무협소설에 나오는 비급들의 이름이다. 즉, 이 부분에서 주성치는 우연히 구한 비급을 열심히 익혀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는 무협의 전형적인 패턴을 오마쥬 한 것이다.그러나 과연 비급으로 무공을 익힐 수 있을까? 필자는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사부를 만나서 꾸준히, 죽도록 연습해야 한 가지 무술이라도 익히는 게 가능해진다. 그러니 무림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사부를 만나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배사의식이다. 배사(拜師), 즉 사부를 모시는 의식이다.
필자는 팔괘장을 배웠다고 했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참관하는 기분으로 다녔기 때문에 거의 배운 게 없다. 기본 장법이 여덟 개의 형(초식이라고 읽어도 좋겠다)으로 이뤄져 있는데 2년 동안 네 초식밖에 익히지 못했다. 설인호 노사의 눈으로 봤을 때는 아주 게으르고 불량한 수련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를 거기로 안내해 준 한병철과 한병기 형제는 대단히 열심히 배웠다. 그래서 팔괘장 5대 전인인 설인호 노사의 정식 제자가 될 수 있었다.
팔괘문에는 장문인이 없다. 팔괘장이라는 무술을 만들어 문파를 연 초대 동해천 조사께서 특정 제자에게 장문인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팔괘문에는 전인(全人), 제자(弟子), 학생(學生)이라고 등급을 분류한다.
팔괘문에서 전하는 모든 무술을(장법 뿐 아니라 타 문파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무기술이며 금나술 같은 것이 꽤 많다) 익히면 전인, 정식으로 배사를 했지만 다 배우진 못했으면 제자, 제자가 되기 전의 수련생 단계를 학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렇게 치면 필자는 학생, 그것도 불량학생이었던 셈이다.
한병철, 병기 형제는 그런 불량학생인 필자에게 영광스럽게도 배사의식의 진행을 하는 사회자의 역할을 맡겨주었다. 문파의 배사의식은 초대받은 극소수에게만 공개되는 행사다. 이날의 의식을 위해 북경에서 4대 전인이자 설인호 노사의 사부이신 이공성 노사가 초대 동해천 조사, 2대 양진포 전인, 3대 이자명 전인의 영정을 모시고 서울로 날아왔으니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한 행사였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구배지례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무협소설을 보면 흔히 구배지례(九拜之禮)라는 용어가 나온다. 사부를 모실 때 아홉 번 절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건 우리나라 식으로 한 번 절하고 일어났다가 다시 절하는 걸 아홉 번 반복한다는 뜻일까? 중국식 절은 우리와 조금 다르다. 필자는 여러 자료를 조사했지만 구배지례와 비슷한 것은 삼배구고(三拜九叩) 밖에 찾지 못했다.
삼배, 즉 세 번 절하고, 구고, 즉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이마를 바닥에 대는, 혹은 소리 나게 부딪치는 방식으로 세 번 절한다는 것이다. 원래는 청나라 시대에 황제에게 절하는 방식인데 필자는 사부를 모실 때도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왔다. 그런데 팔괘문의 배사의식에서 다른 방식의 구배지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먼저 조사야(祖師爺), 즉 초대 동해천 조사의 영정에 세 번 절했다. 다음으로 사야(師爺 : 우리 식으로는 사조라고 불렀을 것이지만 중국에서는 사야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즉 사부님의 사부님인 4대 전인 이공성 노사께 세 번 절했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인 설인호 노사에게 세 번 절했다. 합해서 아홉 번, 즉 구배지례를 한 것이다.
그 뒤에 직접 쓴 배사첩(拜師帖)을 제출한다. 배사첩은 병풍 모양의 작은 책인데 사부를 모시는 각오의 글을 쓰고 본인의 이름을 말미에 적는다. 거기 쓰는 각오의 글은 각 문파마다 정해져 있다고 한다. 배사첩을 받은 이공성 노사와 설인호 노사가 거기 도장을 찍었다. 나중에 구경했는데 ‘팔괘장사대전인이공성’과 ‘팔괘장오대전인설인호’라고 각자된 도장이었다.
그 다음은 훈화 말씀. 이공성 노사가 중국어로, 설인호 노사가 한국어로 길게 축하와 당부의 말씀을 하셨는데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 무덕(武德)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무술과 인격을 함께 닦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진정한 무술은 덕을 쌓음으로써 가능해진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게 팔괘문의 이념인 듯도 했다.
이것으로 배사의식은 끝났는데 사실 문파마다 의식의 방법도 다르고, 그 대부분이 위에 말했듯이 그 문파 사람이 아니면 볼 수 없도록 비밀스럽게 행해진다. 어떤 의미에서 배사의식은 하나의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이는 가족의식과도 비슷하다.스승은 사부다. 사부의 사부는 사조라고 한다. 같은 사부 아래에서 배운 제자들은 사형제라 부른다. 아버지고 할아버지, 형제인 것이다. 그래서 문파라는 것은 하나의 가족처럼 구성된다.
그러니 굳이 남에게 보여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한병철씨의 말이다. 그는 또한 배사의식을 치른 것을 마치 그 무술 문파의 한국지부장 자격증처럼 선전하는 일을 경계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글이 그렇게 읽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첨가하는 말이다.무협작가로 ‘대도오’, ‘생사박’, ‘혈기린외전’ 등의 작품이 있다. 무협게임 ‘구룡쟁패’의 시나리오를 쓰고 이를 제작하는 인디21의 컨텐츠 담당 이사로 재직 중이다.
[사진설명 : 사진 순서대로..]
◇ 팔괘장의 투로(초식이라고 할 수 있다)를 기록한 도보. 일종의 비급인 셈인데 이것만 보고 익힐 수 있을까?
◇ 팔괘장배사식 장면. 정면 제단에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왼쪽에 앉은 사람이 설인호 노사, 오른쪽이 이공성 노사다.
◇ 배사첩에 도장을 찍는 이공성 노사.
◇ 팔괘장의 창시자 동해천 조사.
◇ 2대 양진포 노사.
◇ 3대 이자명 노사.
◇ 동해천 조사의 묘 앞에 서 있는 한병철씨와 이공성 노사.
<좌백(左栢) jwabk@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