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순간들]김영섭 ARM코리아 사장(1)](https://img.etnews.com/photonews/0509/050912101732b.jpg)
지금 나는 ARM이라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설계 관련 IP(지적재산권) 업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처음 내가 사회에 발을 붙인 곳은 반도체와는 거리가 먼 건설 분야였다.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1981년 나의 첫 직장은 대림산업이었다. 80년대 초반은 중동건설 붐이 막바지에 이르던 시절로 국내 건설사들은 사우디아라비아나 리비아 등지에서 도로나 빌딩 그리고 항만, 발전소 등을 건설하며 오일 달러를 쓸어 담았다.
기계공학과 출신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다란, 알코바, 리야드 건설현장에서 나는 주로 발전소나 담수화 설비와 같은 플랜트 작업에 필요한 부품 및 설비 중장비 등의 구매 및 관리감독을 맡게 되었다.
또 공사의 중간 중간에 감리를 맡은 미국의 벡텔사와 공사가 실 설계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제대로 된 부품과 설비를 썼는지, 공기는 계획대로 진행되는지 등에 대한 보고 업무도 담당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서 일하다 보면, 목마름과 더위 때문에 금방 지치곤 했다. 이따금 모래바람이라도 한 번 불면, 코와 입, 그리고 귀에 메케한 먼지가 가득 차곤 했다.
그러나 나에게 힘든 것은 더위나 모래가 아니었다. ‘이 정도야 나중에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작 내가 가장 힘들어 했던 부분은 작업 인부들과의 관계였다. 처음에는 이들의 문화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들 방식대로 몰래 담근 술을 땀에 절은 작업화에 담아 하룻밤에 5병이나 마신 적도 있었다.
감독하는 입장이다 보니 현장 작업자들과 대립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들은 현장에서 직접 터를 닦고, 기계를 부리고 설비를 조립하다 보니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였기에 거칠었고, 나는 그런 그들을 다루기에는 경험이 짧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내 적성에도 편하지 않았다.
더구나 현장 작업자들 중 많은 이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 보니, 관리 감독자인 내 말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느슨하게 관리하자니 벡텔의 엄격한 감리를 통과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설비조립 후 벡텔의 재시공 요구로 인해 분해와 재조립을 하느라 회사에서 상당한 피해를 본 경우가 이미 있었기에 회사 측도 관리자들에게 작업자들을 엄격하게 다룰 것을 교육시켰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대학 때 사귀던 여자친구와 사우디에서 근무 중 1달간의 휴가를 얻어 속전 속결로 결혼식을 마쳤다. 1달도 안되는 신혼을 보내고 김포공항에서 헤어지던 순간과 사우디 다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메케한 모래먼지와 범벅이 되어 흘렸던 눈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떨어져 있는 동안 아이도 태어났다. 사하라사막에 모래 바람이 불어 잠시 휴식을 취할 때면 나는 아이와 아내사진을 보고 그들을 그리워했다.
sam.kim@arm.com